프로젝트 헤일메리:우정이 이긴다

-원작팬의 즐거움과 아쉬움

by 이건해

원작도 개봉하자마자 보고 격한 감동을 느낀 터라 (후기까지 씀) 영화화 소식에 대단히 기뻤고, 당연히 개봉하자마자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는데…… 바빠 죽을 판에 혼자 영화나 보러 가는 일에 심한 죄책감을 느끼는 지경이 되었고, 따라서 친구들과 일정을 맞춰서 보느라 지난 주말에야 프로젝트 헤일메리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자체와는 별개로 이 과정도 상당히 험난하더군요. 기왕 우주가 나오는 대작을 보는 김에 아이맥스로 보기로 한 것까진 좋았는데, 예매가 끔찍했던 것입니다. 일단 예매를 언제 시작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죠. 원래 기억하기론 텔레그램에 예매 알림 봇이 있었는데 다시 찾아보니 사이트 구조가 바뀌어 무용지물이 되었고, 남은 것은 디스코드의 봇 같은 시스템 뿐. 그리하여 먼저 열린데다 경쟁도 비교적 적은 영등포 상영관을 잡아놓고, 다음날부터 예매가 시작될 법한 5시부터 6시 경에 시도때도 없이 CGV앱을 열어 예매 상황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다 이틀쯤 뒤 6시에 작동하는게 맞는지 알 수 없던 디스코드 봇이 알림을 보내주더군요. 알림을 놓칠까봐 갤럭시 루틴으로 디스코드 알림이 오면 따로 추가 알림까지 울리도록 설정해둔 덕에 곧바로 자전거를 세우고 앱을 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남은 것은 장애인석 4자리뿐이더군요. VIP회원은 예매 시작 알림을 먼저 받는다던데, 알림을 받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예매를 마쳐버린 것인가……. 아무튼 시작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는 게릴라 수강신청 같은 예매 전쟁에서 실패하고, 영등포 아이맥스로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VIP가 특별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건 이해하지만, 할인권이나 사은품을 더 주는 게 아니라 관람 기회 자체를 먼저 줘버리는 건 너무한 게 아닌가 싶더군요.


어쨌거나 프로젝트 헤일메리(이하 프헤메)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훌륭했습니다. 아스트로파지의 특성이 어떻고, 지구에 무슨 위기가 오고, 기술적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서 헤일메리호를 발사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는 지루해지기 딱 좋은 부분인데 위트있게 잘 축약하고 넘어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도 약간 길다는 느낌을 받긴 했으나, 충분히 즐길 만했습니다.


이야기는 영화판의 거의 모든 것이라 할 만한 로키를 빠르게 등장시켰습니다. 이것도 좋았습니다. 버디물로 포지셔닝했으니 버디가 빨리 나오는 게 좋았죠. ‘거미형’이라는 설정이 무색하게도 귀엽게 잘 만들어지기도 했고,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한 그레이스와 합도 좋았습니다. 그동안 인간과 교감하는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는 작품에서 외계인은 대개 눈 정도는 달려있는 생물이었는데, 이렇게 눈도 얼굴도 없는, 영 생물 같지 않은 생물이 사랑받는 걸 보면 확실히 잘 만들어진 조형입니다.


로키 얘기를 먼저 해버렸는데, 고슬링의 그레이스도 이보다 나은 버전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마션의 주인공이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나 있는 느낌을 주는 것처럼 그레이스는 항상 은은한 슬픔과 우울에 젖어있는 듯했습니다. 적성에 맞는 일을 하고 있지만 자신이 낙오자, 도망자, 외톨이임을 은연중에 인식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였죠. 그런 동시에 늘 긱처럼 단정치 못한 후줄근함을 두르고 다니면서도 꾸안꾸로 멋이 나는게 대단했습니다. 보는 내내 시각적인 즐거움과 위트가 있어서 좋았죠.


이 이야기에서 반쯤 악역을 맡고 있는 산드라 휠러의 스트라트도 대단했습니다. 그냥 얼굴을 보자마자 원작의 관료적 위압감이 느껴졌는데, 그 위압감 뒤에 줄곧 회의감이나 죄책감, 탈력감이 깔려있는 듯했습니다. 라이언 고슬링처럼 딱히 무슨 대사를 안 해도 인상만으로 배경이 설득되는 그런 캐릭터였습니다.


그럼에도 영화판에선 스트라트에게 장면을 더 할애해주는데, 그녀가 가라오케로 아주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죠. 합창단이었다는 자기 말대로 폐부를 찌르는 실력으로 부른 그 노래는 추가 설정이나 장면을 대신하여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원작에서는 스트라트가 허심탄회한 속마음을 조금 드러내는 장면이 있는데, 그 부분을 충분히 대신한 듯합니다. 여담으로 스트라트는 삐끗하면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닥치고 해!’라고 소리치는 커리어우먼형 캐릭터나 신적인 카리스마의 신비주의형 캐릭터가 되기 쉬운 역할인데, 어느쪽도 아닌 지친 관료로 보였다는 게 좋았습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1.jpg

(얼굴도 없고 실존하지도 않는 지적생명체에게 우정을 느낄 수 있다는 놀라움. 이미지:소니픽처스)



(원작과 영화 양쪽 스포일러 주의)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잘려나간 게 많다는 얘기를 잘 알고 있었음에도 후반에선 아쉬운 점이 제법 있었습니다. 로키를 만나서 소통하고 타우메바를 발견하는 중반까지는 로키와의 관계에 중점이 놓인 덕분에 만족스러웠는데, 영화판에서 가장 큰 위기라 할 수 있는 사고부터는 원작의 여러 부분을 생략한 탓에 극의 긴장감이 쭉 내리막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영화의 후반은 이렇습니다. 우주선에 심한 회전이 걸려 그레이스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로키가 목숨을 걸고(산소를 흡입하면 신체가 손상) 자기 공간에서 나와 그를 구하고, 다시 자기 공간으로 들어가 깊은 잠에 빠집니다. 깨어난 그레이스는 어떻게 해주지 못하고 그를 지켜보는 한편으로 타우메바를 진화시켜 질소 저항성을 갖도록 만들고, 로키가 깨어나자 곧 헤어집니다. 이후에 그레이스는 지구로 돌아가려던 중에 완전한 해결책일 줄 알았던 타우메바가 진화 과정에서 로키가 사용하는 물질인 제노나이트를 통과하는 능력을 얻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타우메바가 연료인 아스트로파지를 먹어치워 항행을 할 수 없게 된 로키에게 돌아가 그를 구합니다. 이 결정으로 지구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그레이스는 일단 로키의 행성에서 지내게 됩니다.


줄거리를 간추려놓으면 원작에서 대세에 영향을 주지 않는 부분만 잘 편집해 버린 것 같지만, 이 이야기는 결정적인 단점을 품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처하는 위기가 텍스트로 표현되는 실험실 안의 기술적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따지고 보면 프헤메의 상당부분이 상세한 설정들의 상호작용 모음 같은 것들이라 자유의 여신상이 무너지거나 우주선에 식인괴수가 침입하는 등의 시각적 위기와 거리가 있긴 하지만, 극 초반에선 아스트로파지의 특성을 알아내는 따분한 학술적 상황을 여러 방법으로 재미나게 보여줬습니다. 그런 반면에 문제 하나가 해결되면 다음 문제가 복병처럼 나타나서 그레이스를 위기로 내모는 후반의 전개가 적당히 넘어간 건 상당히 아쉬웠습니다. 특히 원작에서 그레이스가 상당한 부상을 입어가면서 로키를 되살린 것이 삭제된 것, 그리고 타우메바가 의도와 다르게 진화하여 탈출하고 아스트로파지를 고갈시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일련의 사건을 대사와 극히 짧은 클립으로 대강 넘어간 부분은 극의 앞뒤 비중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스트로파지 연구 얘기를 줄이고 타우메바 문제를 약간 더 묘사해줬어야 긴장감이 지속되지 않았을까요?


영화에서 지금과 같은 구성을 취한 결과, 프헤메에서 가장 감정이 고조되는 클라이막스는 사고와 그 뒤의 작별 부분이 된 듯했습니다. 그 직후 그레이스가 지구 귀환 대신 로키를 구하러 가는 부분은 에필로그의 일부로 취급된 것 같았죠. 아마도 시간을 들여 두 지성체의 우정을 깊이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이 터널의 이별을 보여주는 것이었던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제가 느끼기로 원작에서 가장 감정이 고조되는 부분은 그레이스가 귀환을 포기하고 로키를 찾아내어 재회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목숨을 버리는 재회였으니까요. 이것도 다 원작에 비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원작팬의 시건방진 불평, 혹은 개인적 감상에 기반한 불만일지도 모르겠지만, 프헤메는 재난물의 일종이기도 하고, 재난물은 ‘재난 앞에서 인물이 어떤 결정을 하는가’가 주요한 이야기가 되는 만큼, 그레이스와 로키가 목숨을 던진 결정의 무게감을 보여주는 방식은 분명 원작을 떼어놓고 봐도 심심한 감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프헤메가 대단히 재미있고 반갑고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근래에 들어서 본 SF 영화 중에서 이 정도로 색상이 매력적인 작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우주의 광대한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외계 행성의 대기나 페트로바선의 몽환적 색채의 아름다움도 충만했고, 난장판이 된 우주선이나 창문을 바라보는 그레이스의 모습, 도망치는 그레이스의 모습에서까지 구도의 아름다움이 넘쳐났습니다. 내용면에서도 외계생명체가 감염시키고 침공하고 죽여대는 얘기를 주로 보다가, 같은 대기를 호흡할 수도 없는 존재들이 합심하여 서로를 구한다는 얘기를 보니 불안하기만 한 세상 속에서 안도감이 느껴졌습니다. 인생 최고의 SF 영화가 무엇이냐는 얘기로 흔히 인터스텔라가 거론되곤 했는데, 이제 가족애를 핵심 가치로 둔 인터스텔라보다는 얼굴조차 없는 돌덩이 외계인과의 우정으로 관객들을 눈물짓게 한 프헤메가 더 오래 회자될 이야기라는 생각도 듭니다. 만약 프헤메의 외계인이 어쩐지 공교롭게도 피부만 파랗고 인간 기준으로 신기할 정도로 빼어난 미녀고, 그레이스와 모험 끝에 결국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 되었다면 작품이 얼마나 납작한 얘기가 되었을까 상상해보면, 상대가 죽든말든 유전자 보존에 하등의 상관이 없는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우정이야말로 우주적으로 더 널리 퍼져야 할 가치인지도 모릅니다.


*덧붙여서1

프헤메에서 로키의 촬영은 퍼펫과 애니메트로닉스를 사용하고, 그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부분은 CG를 쓰는 방식을 썼다고 하는데, 라이언 고슬링이 그린스크린 앞에서 허공을 보고 울고 웃은 게 아니라 인형을 두고 연기했다고 생각하면 퍽 마음이 놓이는 구석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물을 두고 연기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아마 이런 안도감이 인간과 요상한 외계생명체 사이에 우정이 있을 수 있다는 증거일 겁니다.


*덧붙여서2

앤디 위어의 전작을 영화화한 ‘마션’은 주인공이 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질문 있냐고 묻자 학생들이 너도나도 손을 드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걸 본 뒤에 프헤메 소설을 읽었을 때, 마지막 장면이 에리디언 학생들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너도나도 발톱을 들어올리는 것이라 저는 상당한 의문을 느꼈습니다. 이걸 그대로 영화화하면 엔딩이 너무 중복이 되겠는데 어떡하려나 싶었던 것이죠.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오히려 만족스러웠습니다. 마션과 달리 주인공이 학생들을 보고 더할나위 없이 행복하게 웃는 모습으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저 일을 정말 사랑하는구나’ 싶은, 그런 진심어린 웃음으로 보여 마음 깊이 남는 장면이었습니다. 사실 원작에선 꼭 행복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문제를 안은 상황이었는데, 영화에서 그런 문제들을 깔끔히 쳐내고 행복에 집중하니 정말 잘 됐구나 싶어 마음이 좋더군요. 역시 버릴 걸 버리는 편집이 좋은 점도 많은 모양입니다.




*추신

제가 쓴 SF단편소설 ‘장어는 어디로 가고 어디서 오는가'가 수록된 2025 제12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단편 수상작품집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장어의 산란지를 발견하기 위해 해구를 탐사하는 과정을 둘러싼 공포와 철학적 분쟁. 상상하지 못한 뜻밖의 이야기를 만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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