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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ul 05. 2017

전자화된 취미의 희망

덕질에는 많은 종류가 있지만 상당히 많은 덕질이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도 결국은 현실에 존재하는 물건을 획득하는 방식으로 영위되곤 한다. 요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나서 블루레이 박스 세트를 산다든가 애니메이션을 보고 피규어를 산다든가 하는 식이다. 사람은 보통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자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형태를 가진 물건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런 덕질에는 금전 이외에도 심각한 제약을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실존하는 물체를 모으는 ‘현물 덕질’을 지속하면 공간이 모자라게 된다!


까짓거 책 한 권, 음반 한 장 이런 것 사는 게 자리를 차지해봐야 얼마나 차지하겠어? 싶기도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이 짓을 몇 년 지속하면 그 기세가 무시무시하다. 


특히 그렇게 모으는 물건 중에서 가장 흉악한 타입은 ‘박스를 버릴 수 없는 것’이다. 피규어, 프라모델, 한정판 게임, 블루레이 박스세트……. 이런 박스가 딸린 물건은 살 때는 대단한 선물이라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 머리가 차갑게 식으면 어째 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 박스 부피의 5분의 1이 될까말까 한 내용물 뿐인데, 이런 박스들이 방안을 잠식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한 건 한 사람 뿐인데 결혼하고 보니 그 집안 식구가 모조리 딸려온 상황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이건 너무 암담한 비유일지도 모르겠다.


다음으로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제 쓸모 없지만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플레이스테이션 1, 2, 3 게임 같은 것들. 그렇지 않아도 재미있는 신작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마당에 대체 언제 시간을 내서 구기기로 명작을 다시 한단 말인가? 진짜 명작이라면 리메이크 되거나 이식되기 마련이므로 굳이 게임을 고이 갖고 있을 필요도 없을 뿐더러, 애초에 나처럼 새 기기를 마련할 때 구 기기를 팔아버리는 사람도 많다. '갖고 있으면 이 기기의 값은 땅을 치겠지만 옛날 게임을 언젠간 또 하고 싶어질 수도 있으니까' 같은 생각을 할 정도로 여유롭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때도 이미 값이 너무 떨어져 차마 팔지 못했거나 추억이 너무 강렬해서 계속 간직하게 된 게임들은 고스란히 자리를 차지하고 만다. 추억의 보존은 비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리를 차지한 마물들을 보고 있자면 그때 팔아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렇지만 역시 대수롭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가장 골칫거리가 되는 것들은 다름아닌 책이다. 단순한 덕질이라면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국한되기 마련이라 그 증식량이 그렇게 심하지 않다. 하지만 책을 한 권 다 읽으면 다음 책을 고르는 게 당연한 부류의 사람들, 그리고 나처럼 직업적으로 책을 봐야만 하는 사람들은 이게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숨을 쉬면 산소가 사라지고 이산화탄소가 쌓이듯, 방안의 공간이 줄어들고 책이 쌓이고 마는 것이다.


만약 생활공간이 지금의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어떡할 것인가? 일상의 안정성이란 살얼음판 위에 놓인 것이나 다름없어서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모른다. 책장을 볼 때마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오싹한 생각이다. 그래서 장서를 어떻게든 감축해보자고 생각은 하지만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팔아치우자니 만원 넘는 책을 천 원 이 천원에 넘기는 게 여간 아깝지 않다. 제아무리 지독한 책이라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긴 있기 때문이다. 추악한 지옥 마귀의 샘플을 실험실에 전시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적어도 천 원에 넘기는 것보다는 갖고 있는 편이 낫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도통 처분할 수 있는 책이 없다. 결국 두번 다시 읽지 않을 책을 고르고 골라 매서운 각오로 팔아치우고 푼돈을 손에 쥐며, 어지간한 책은 빌려보거나 전자책으로 사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전자책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주거 환경을 위협할 정도로 큰 문제거리인 책을 실물이 아닌 전자책으로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마음 같아서는 대부분의 장서를 전자책으로 바꾸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업체를 통해 책을 스캔하는 것은 불법이 되어 돈을 주고도 못하는 짓이 되었고, 그렇다고 북스캐너를 사서 하나하나 스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느 시점이 되면 책을 넣기만 하는 것만으로 스캔이 완료되는 인공지능 북스캐너가 나오지 않을까 싶지만 그건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니 지금은 그냥 나오는 전자책이나 살 수밖에 없다.


아무튼 전자책 서재를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다른 취미도 전부 전자화해버리는 것은 어떨까? 몇 년째 그 유행의 불길이 사위지 않는 CCG나 가챠 게임을 보고 있으면 이미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집에서 전자 아이돌의 전자 콘서트를 볼 수 있는 시대 아닌가. 나 역시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는 화면 속의 캐릭터를 갖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고, 갖고 있는 캐릭터 카드를 실물로 만져볼 수 없다고 아쉬워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아예 수많은 취미를 통합해서 전자적 취미방을 구성하는 것은 어떨까? VR 기기를 이용해서 무한정 늘어날 수 있는 가상의 방을 만들고 그 방안에 전자책도 놓고 포스터도 마구 붙이고 피규어도 프라모델도 닥치는 대로 전시하는 것이다. 한정판 블루레이도 전자 한정판 박스세트에서 꺼내 재생하고, 이런 것들을 직접 관리하기 귀찮으면 전자 집사나 전자 메이드에게 관리를 시키면 된다. 요는 현실에서 개처럼 벌어 전자공간에서 짐승처럼 쓰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적어도 책장이 모자라 물건을 살까말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삶의 만족도도 압도적으로 높아지지 않을까? 


당신만의 행복을 잡으세요


그렇게 생각하면 집안 정리를 하면서도 그럭저럭 기운이 난다. 천년 만년 일해봤자 내 집 장만은 못할지라도 VR기기 하나쯤은 마련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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