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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Nov 15. 2017

이어폰 단자의 끝을 잡고

한국 남자들이 시간 여행에 대해 이야기할 때 '군대를 다시 갈 텐데 정말 과거로 갈 것인가' 라는 문제에 부딪치는 것처럼, 최신 스마트폰을 써서 근미래까지 이어질 첨단 기술을 누리고 싶어도 한 가지 심각한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어폰 단자'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이어폰 단자가 없다니? 이 무슨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근미래의 풍경을 상상했을 때 날아다니는 자동차는 쉽게 떠올리곤 하지만 유선 이어폰 단자가 없는 스마트폰 같은 건 상상한 적이 없다. 물론 곰곰이 생각해보면 놀랄 것도 없는 변화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유선 이어폰은 너무나 당연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풍경이라 이것이 혁신적인 변화를 맞게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이다. 다리가 사라진 안경을 상상해본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어폰에서 선이 사라지면 어떤 이득이 생길까? 많은 기술자들이 이야기하듯, 3.5파이 단자가 사라지면 방수성을 더 높일 수 있고, 내부 공간을 더 확보해서 배터리 용량을 늘리든지, 아니면 기기를 더 얇게 설계할 수 있다. 그리고 사용자는 걸리적거리는 선이 내는 마찰음에 음악 감상을 방해받지 않아도 되고, 자유롭게 운동할 수 있으며, 특히 주머니에서 꺼낼 때마다 꼬여있는 선을 푸는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 이어폰 줄이 다른 사람 옷이나 가방에 걸려 어어어, 하고 당황할 일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썩 멋진 변화다. 깔끔하고 미래적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지불하는 것들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선이 없는 이어폰은 잃어버리기 쉽다. 선이 없으면 그건 그냥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개별적인 물체 두 개에 불과하니까 책상 밑으로 떨어뜨리면 찾느라 한참 고생해야 할 것이다. 지하철 인파 밑으로 떨어뜨린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무선 이어폰은 유선 이어폰보다 비싸니, 그 결과는 참으로 속쓰린 것이리라.


분실은 주의하면 막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문제는 바로 배터리다. 신호를 무선으로 받으니 당연히 이어폰 내에 배터리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어폰이 막대한 전력을 쓰진 않으니까 사용 시간은 충분하다고들 하는데, 사용 시간이 충분하든 충분하지 않든 배터리를 충전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 배터리가 노후되면 사용 시간이 줄어들 거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대단한 단점으로 느끼지 않는 사람도 많겠지만, 나처럼 다양한 휴대기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이렇게 충전할 배터리 하나가 늘어나는 게 이만저만 스트레스가 아니다. 노트북, 스마트폰, 태블릿, 게임기, 전자담배도 모자라서 뭔가 하나를 더 충전하고 살라니, 반려동물 밥주듯이 '자, 밥먹자' 하면 알아서들 충전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이보다 더 치명적인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무선이기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딜레이다. 음악 감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영상 감상에서도 체감할 수 있는 문제는 없다. 어지간한 게임도 잘 할 수 있다. 하지만 리듬에 맞춰 정확히 화면을 눌러야 하는 리듬게임을 할 때만은 무선 이어폰의 딜레이가 엄청나게 절실하게 느껴진다. 소리가 영상을 도통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다. 예전에 블루투스 리시버를 써서 컴포넌트의 우수한 음질로 리듬게임을 해보려했다가 도저히 손댈 수 없는 수준이라 당장 집어치웠는데, 최고의 기술이 고작 이 정도라는데 가슴 아프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무엇으로 바꿀까 고민하고 최신 기종들의 엄청난 기술에 감탄하면서도 이어폰 단자가 없다는 대목에서는 주춤하게 된다. 물론 3.5파이 단자라는 게 50년쯤 된 기술이니까 슬슬 버려질 시기가 지난 것이 사실이긴 하다. TV도 아날로그 송신은 끝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를 대체할 기술이라고 이어폰 단자를 뻥 차고 튀어나온 것이 사실은 불완전한 기술이었던 것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리듬게임은 본의 아니게 타이밍에 관한 한 음향 전문가 영역에 한 발을 걸치고 있고, 현존하는 무선 이어폰 기술은 전문가 영역까지는 커버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보는 게 좋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이 기업이 진지하게 고려할 만큼 넓은 영역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굳이 유선을 제거해버렸다는 점 때문에 내 취향까지 내다버려진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까지 없애야 했으면 좀 더 기술이 발달한 다음에 없애든지? 기기를 소형화하는데 필수적인 과정이었다는 변명도 마음에 들진 않는다. 그냥 크게 만들란 말이다! 이어폰 단자가 있고 배터리 오래 가고 튼튼한 스마트폰을 내놔!


애플은 이어폰 단자를 버렸지만 나는 버리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어폰 단자가 제거된 기기라도 유선 이어폰을 쓸 수야 있다. 꼴사납고 추접스러운 젠더를 쓰면 충전 단자로 유선 이어폰을 연결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쓰고 싶진 않다. 일단 충전 하면서 동시에 이어폰을 쓸 수 없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그리고 젠더의 내구성 자체도 신뢰할 수가 없다. 특히 애플이 만드는 케이블이 튼튼할 턱이 없지 않은가? 그따위 것보다는 어디 고분군에서 방금 출토된 말채찍 따위가 더 질기고 튼튼할 게 틀림없다. 이어폰 단선과 젠더 단선을 모두 신경쓰면서 사는 것도 사양하고 싶다. 


그리하여 미래 스마트폰을 향한 내 가상의 여정은 이어폰 단자의 퇴출이라는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최신폰을 쓸 돈이 없기도 하지만 설령 있대도 시원하게 살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업들이 굳이 대세를 역행해줄 것 같진 않으니, 시간이 지나면 아마 누구나 당연하게 무선 이어폰을 쓸 것이다. 아마 나처럼 요상한 데 집착하는 사람들만 유선 이어폰을 쓰게 되겠지. 지하철에서 유선 이어폰을 꼽고 있으면 옆에서 수근거릴지도 모른다. 소수 취향이란 대체로 그런 길을 걷기 마련이다.


시간이 충분히 지나면 딜레이가 거의 발생하지 않으며, 배터리 걱정을 할 필요도 없는 무선 이어폰이 나오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는 일이다. 아마 블루투스 13 ~샤프 리로드 쯤은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때까지 내가 계속 고통받을 것을 생각하면, 이런 식으로 기술의 발전이 불완전하게 과거를 버리고 질주하는 것에 공포마저 느껴진다. 영화 데몰리션 맨에서 존 스파탄 형사가 신형 변기에 적응하지 못해 욕설을 하고 딱지를 끊어다 뒤를 닦는 모습이 나오는데, 아마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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