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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Dec 20. 2017

어깨가 아픈 자야 너는 빨리 가방을 사라


잘 생기고 예쁜 가방을 무척 좋아해서 디자인과 색깔, 용도에 따라 수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하지만, 당연히 그런 사치를 부릴 처지는 아니라 있는 가방을 오래도록 적당히 써 왔다. 그렇게 쓰는 가방이 딱 세 가지인데, 하나는 잔스포츠에서 나온 커다란 파란색 책가방, 그리고 또 하나는 라이프 가드의 크로스백, 마지막이 이름 없는 인조 가죽 크로스백이다. 


이것들은 정확히 용도에 따라 나눠 쓰고 있다. 일상적으로 노트북이나 책 여러 권처럼 큰 짐을 갖고 다닐 때는 책가방을 쓴다. 미팅이나 면접, 결혼식처럼 아무래도 책가방을 메고 가기에는 겸연쩍은 자리에는 크로스백을 손으로 들고 간다. 물론 내가 편해서 책가방 메는 데 아무렴 어때 싶은 마음도 있고 관혼상제에 책가방을 메고 가면 안 된다는 조례 따위가 있지도 않지만, 정장을 차려입고 파란 책가방을 메면 어딘지 모르게 바보스러운 기분이 드는 탓이다. 아무튼 살다 보면 검은 색 각진 손가방이 없어서 곤란해지는 날도 있는 법이라 크로스백 지퍼가 고장났는데도 계속 쓰고 있다. 세 번째 가죽 가방은 고속 터미널에 놀러 갔다가 모양이 좋아서 생각 없이 턱 사버린 물건인데, 사놓고 보니 작으면서도 아이패드 정도는 들어가는 사이즈라 거의 짐없이 가볍게 돌아다닐 때 애용하고 있다.


이중에서 가장 오래 쓴 녀석은 단연코 책가방이다. 너무 오래 써서 정확히 얼마나 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다. 10여년 정도 쓰지 않았을까? 지하철에서 책을 쉽게 넣고 뺄 수 있는 큼지막한 외부 주머니, 그리고 필통을 넣기(실제로는 전자담배를 넣지만) 딱 좋은 사이즈의 상단 주머니가 이상적이며, 무엇보다 보드게임을 두 박스는 넣을 수 있는 무지막지한 용량 덕에 오랜 세월 동안 다른 가방을 쓰려다가도 몇 번이고 포기하고 이 책가방으로 돌아왔다. 무리해서 무겁게 들고 다닌 탓에 등쪽 끈이 이어진 부분이 세 번쯤 터졌지만, 이것도 청바지 조각을 대고 열심히 꿰매어 사용했다. 알뜰하다면 알뜰하고 궁상이라면 궁상인데, 이것보다 더 나은 가방을 찾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고작 가방 찾는 일에도 사람이 몇 번 실패하면 ‘나는 이 가방이 제일 잘 어울려’ 하고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것 같다.


좋은 신발은 당신을 좋은 곳에 데려다 주지만, 나쁜 가방은 당신을 병원에 데려다 줄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필사적으로 새 가방을 찾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그 이유는 가방이 낡아서가 아니라 내 어깨가 낡아서였다. 놀러 갈 때마다 8킬로는 나갈 가방을 메고 다닌 데다가, 평소에는 노트북용이 아닌 가방에 안전 봉투로 싸맨 노트북을 넣고 다닌 탓인지, 아니면 운동을 잘못 한 탓인지 오른쪽 어깨가 어긋난 것처럼 쑤시고 아프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오십견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면서 어깨 운동을 포기하고 마사지 하면서 버텼는데, 잘 생각해보니 계속 그렇게 버틴다고 대단한 목돈이 모이는 것도 아니고, 산신령이 참 알뜰하고 착하다며 황금 가방을 던져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두어 달 검색한 끝에 튼튼하고 비싼 노트북용 백팩을 사 버렸다.


그렇게 산 것이 바로 샘소나이트 백팩이다. 대략 8만원 정도 했으니 평생 4만원을 넘어가는 가방을 사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대단한 결심을 한 셈이다. 하지만 이 가방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세운 기준을 통과하는 가방이 사실상 그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기준이란 다음과 같다.

-노트북 수납 공간이 있을 것.

-책을 수납할 수 있는 외부 주머니가 있을 것.

-필통(담배)를 넣을 수 있는 두 번째 외부 주머니가 있을 것.

-이 외부 주머니들은 상단이 작고 하단이 클 것.

-등 부분이 인체공학적 매쉬 쿠션으로 되어 있을 것.

-유지관리가 편하고 가벼운 폴리에스텔 재질일 것.

-손잡이가 튼튼할 것.

-10만원 이하일 것.


엄청나게 까다로운 조건은 아닌 것 같지만 이 조건을 모조리 통과하는 가방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반드시 뭔가 하나에서 탈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준에 맞는다는 녀석을 발견하자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주문하고 말았다. 도착한 녀석을 보니 예상보다는 무거웠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아이패드를 넣을 공간이 따로 있는 데다가 캐리어 손잡이에 끼울 수도 있었다.


여기서 가방 자랑을 더 했다간 샘소나이트 홍보가 될 것 같으니 적당히 줄이기로 하자.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놈으로 백팩을 바꾼 이후로 어깨 통증이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다. 부적절한 용도변경으로 균형이 맞지 않는 가방을 쓰는 게 어깨 통증의 원인 중 하나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기쁜 한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고, 한심한 기분마저 들었다. 더 일찍 샀다면 고통스러운 나날도 훨씬 일찍 끝났을 텐데,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가방은 멀쩡하니까 굳이 서둘러 바꿀 필요 없어! 하는 핑계로 정말 필요한 소비에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알뜰과 궁상은 구별해야 하고, 실생활, 특히 건강과 밀접하게 관련된 물건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건 그렇고 이 가방을 장바구니에 넣어놓은 상태로 계시라도 기다리듯 버티던 기간에 상설 할인매장에 갔다가 4만원쯤 하는 이름 없는 노트북 가방을 살 뻔했다. 내 궁상스러운 성격상 그 가격은 당연히 끌리는 조건이었는데, 고작 4만원 차이 때문에 또 10년쯤 쓸 수도 있는 물건을 이만하면 괜찮다고 합리화하며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사지 않은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4만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를 천만다행이다. 물건은 싸다는 이유로 사는 게 아니며, 오래 쓸 물건은 가격으로 타협하면 안 된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그러니 여러분도 가방은 좋은 물건을 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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