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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Dec 13. 2017

게를 비틀어 나를 채운다

언젠가 가족끼리 홍게를 먹으러 갔다. 홍게. 동해안 깊은 곳에 사는 대게과의 생물로, 익히기 전부터 익힌 것처럼 빨간색을 띄고 있는 게다. 5만 5천원에 세 마리를 팔고 있었는데 세 명이 먹기에 그리 나쁘진 않다고 하기에 그것을 시켰다. 그러자 커다란 게 세 마리가 보기 좋게 해체되어 나왔다. 길쭉한 다리, 굵직한 집게발, 몸통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집게발은 이리저리 잘 쪼개서 살을 파먹기 좋게 해 놓았고, 길쭉한 다리들은 관절을 제거하고 위쪽 다리에 아래쪽 다리를 박아놓았다. 그래서 아래쪽 다리를 밀면서 위쪽 다리를 빨아들이면 살이 쏙 빠져나오게 되어 있었다. 몸통은 배쪽의 딱지를 완전히 제거한 다음 속을 거의 파내고 날치알을 버무려 잘 볶은 밥을 채워둔 상태였다. 큰 게를 요리하면 대체로 이렇게 나오는 모양인데, 참 대단하다. 누가 생각한 것인지 모르겠다.


먹기 좋게 잘 나온 홍게는 맛있었다. 대게나 꽃게와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생각해보면 그건 영 모르겠지만, 향긋하고 탱탱한 살은 맛도 있었고, 쏙쏙 빨아먹는 것 역시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다만 해산물이 대체로 그렇듯이 양은 좀처럼 차지 않았다.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마치 먹는 속도보다 소화되는 속도가 빠른 것처럼 점점 배가 고픈 느낌마저 들었던 것이다. 그나마 게딱지 밥을 먹으니 양이 좀 차는 것 같아서, 게란 배부르지 않게 술을 즐기기 위한 안주에 가까운 편이고, 정말 속을 채우는 것은 게딱지 밥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영 신경쓰이는 게 있었다. 우리는 창가쪽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게가 잔뜩 들어있는 수조가 창가에 딱 붙어있었던 것이다. 수조 안의 게들은 유리 너머로 맛나게 식사하는 우리를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특별히 소심한 탓이겠지만, 이건 아무래도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리 편안한 자리가 아니었다. 아니, 잔혹무도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분명했다. 갇혀있는 생물이 보는 앞에서 그 생물의 동족을 요리해서 맛있게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그 요리법이라는 것도 그 생물 입장에선 지옥도가 따로없는 악마들의 소행으로 보일 지경이다. 끓는 물로 익혀버린 다음, 온몸을 난도질해서 다리를 전부 떼어내고 위쪽 다리에 아래쪽 다리를 쑤셔박는다. 복부는 뜯어내서 내장을 빼낸 다음 그 안에 익힌 곡물을 채워넣는다. 이것들을 쟁반에 가지런히 정리한 것을, 포식자들은 갇혀있는 그 생물 앞에서 보란듯이 먹는 상황이었다. 너의 미래가 바로 여기 있다는 듯이.......


어휴 잔인해, 하면서도 군침이 도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정말 인간만큼 무도하고 자비없고 흉악한 종족이 또 없지 않을까 싶다. 게장을 다룬 안도현 시인의 시, '스며드는 것' 역시 아름답지만 인간의 오싹함이 잘 드러나있다.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게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까지 수난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닭을 다른 닭이 보는 앞에서 뜯어먹거나 산 채로 털을 뽑고 양념장에 처박아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아니, 가만 보면 인간은 대체로 해산물을 흉악하게 처리하는 것을 즐기는 경향이 있고, 잔인무도하게 처리할수록 고급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회 역시 생선을 죽이지 않고 살을 저며내면 대단한 고급 회로 칭송받지 않는가? 이 역시 닭을 붙잡아놓고 산채로 가슴살을 발라내는 짓을 하지 않는 것과 비교하면 흥미롭다.


어째서 인간은 해산물을 이토록 잔인하게 다룰 수 있는 걸까? 물론 이것은 인간이 해산물과 하등의 공감을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호스텔'이라는 영화 시리즈가 있는데, 여기 나온 장면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북유럽 관광 산업에 지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얘기가 있는 이 영화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주인공이 새로 사귄 친구를 따라 잘 알려지지 않은 북유럽 어느 마을로 여행 갔다가 비밀 살인 클럽에 잡혀가서 잔혹하게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밀 살인 클럽은 납치된 사람들을 경매로 사서 지하 시설에 묶어놓고 마음대로 하는데, 개중에는 산 사람의 다리를 잘라서 스테이크처럼 먹는 사람도 있다. 적어도 다른 인간 앞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니 나보다 너그러운 처사지만.


아무튼 이 잔인한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은, 어떤 구매자는 자신과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만 원한다는 점이다. 요는 살려달라는 소리를 알아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말이 통하면 공감하고 이입하는 부분이 발생하는 탓이리라.


인간이 해산물을 잔혹하게 다룰 수 있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활 환경과 방식이 천지차이니까 겉보기에도 이입이 잘 되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며 해산물은 비명조차 지르지 않으니 자비롭게 다룰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곤충을 다루는 것과 별다를 게 없다. 어류나 갑각류가 칼을 댈 때마다 엑소시즘을 당하는 악마처럼 처절한 비명을 지르고 저주의 폭언을 쏟아낸다면 해산물 요리의 양상도 상당히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우주적 박애주의자라도 되는 것처럼 이런 소리를 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회도 게도 좋아하지만(안도현 시인도 게장을 참 좋아한단다), 그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넓고 넓은 우주 어딘가에 너무나 고등해서 인간과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발전한 육식 종족이 있지 않을까? 그런 종족이 보기에 인간은 단지 쓸데없이 많고, 묘하게 성가신 방어 기술을 보유한 식재료 일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게처럼....... 그런 종족에게 잡혀가면 깔끔히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날 가둬놓은 우리 너머로 다른 인간의 살을 빨아먹는 고등 종족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면 그 모습을 보고 인간을 인간 앞에서 잡아먹는 게 영 편지 않았다는 글을 쓰는 고등 종족이 하나쯤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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