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Dec 06. 2017

지갑의 무게, 심장의 무게

남편 기죽지 말라고 지갑에 몰래 용돈을 채워주는 아내, 부모님 지갑에 용돈을 넣어주는 자식… 옛날에는 이런 요상한 모습을 미디어에서 종종 접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유행이 사라진 것 같다. 그 상황을 상당히 이해하기 힘든 나로서는 퍽 다행이다. 누군가 내 지갑에 몰래 손을 대고 돈을 넣어뒀다면 불쾌할 뿐더러 자존심도 상할 것 같은데, 이게 그렇게 훈훈한 시츄에이션인지? 돈을 줄 거라면 준다고 말을 하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특히 나처럼 지갑에 얼마가 들었는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라면 5만원쯤 늘었어도 그냥 모르고 지나갈 게 틀림없다. 이랬다간 나는 나대로 뭘 받았는지 모르고, 상대는 기껏 돈을 줬는데 고마워하는 척도 안 한다고 화를 낼 테니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돈이 많이 들어있는 지갑이 자존심의 원천이 되는 시대도 지나가는 것 같다. 그러면서 지갑 자체의 의미도 퇴색하고 있지 않나 싶다. 나도 옛날에, 남의 눈을 상당히 신경쓰고 살 때에는 근사한 가죽지갑에 5만원쯤은 채우고 다녀야 든든하지 않나 생각했다. 특히 내용물은 별로 보여줄 일이 없으니 지갑 자체를 좋은 것으로 쓰려고 했다.


그래서 남들과 비슷하게 새까맣고 반으로 접으면 정사각형에 가까운 직사각형이 되는 지갑을 꽤 오래도록 써 왔다. 남들이 지갑을 꺼내놓으면 오, 가오리 가죽인가, 하고 내심 감탄하기도 했다. 알게 모르게 비교를 하면서 내 것 정도면 누가 한심하게 볼 이유는 없지, 하고 안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요 몇년 사이에 그런 요상한 버릇이 사라졌다. 일단 굳이 잘 보일 필요가 없는 사람들만 만나게 된 데다가,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지갑 내용물이 크게 줄어든 덕이다. 예전에는 분명 지갑 안에 별스러운 잡동사니를 다 갖고 다녔다. 신분증부터 멤버쉽 카드,  카페 마일리지, 서점 회원증, 증명사진, 도서관 회원증, 헌혈증 등등 한 달에 한 번 꺼낼까 말까 한 것까지 모조리 들고 다녔으니 퍽 튼튼한 지갑을 들고다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어지간한 멤버쉽 카드는 전부 스마트폰의 앱으로 대체할 수 있게 되어 내용물이 비약적으로 줄어들었다. 멤버쉽, 마일리지는 모두 사라졌고, 신분증과 결제용 카드 몇 장, 그리고 정기권과 도서관 회원증, 공동현관 열쇠 정도만 있으면 불편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럿이 식사를 하면 돈을 모아서 한꺼번에 결제하는 것이 당연한 풍습이었는데, 요즘에는 몇 명이 모였든지 카드로 각자 자기 몫을 결제하게 되었다. 아니면 한 명이 계산한 뒤에 각자 스마트폰을 조작해서 곧바로 송금해버리는 것이다. 이러니 현금 보관소로서의 의미도 자연히 희박해져, 어디 가서 무슨 수단으로 뭘 살지 확실하다면 지갑은 놓고 카드 지갑만 들고 훌쩍 나가게 되었다. 전투기 한 대로 충분한데 항공모함이 출격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찌나 지갑을 안 쓰는지 가방을 바꿔서 지갑 꺼내는 걸 깜빡 했다는 걸 일주일 쯤 지나서 깨달은 적도 있었다. 


그래서 작년 쯤부터 작정하고 가벼운 지갑을 새로 장만했다. 나일론으로 만들어져 가죽에 비하면 거의 깃털처럼 느껴지는 녀석인데, 처음에는 화면으로 봤던 것 이상으로 볼품이 없어서 ‘뭐, 이 정도가 나에게 딱 어울리나….’ 하고 서브컬처 감성으로 자조하고 말았다. 도무지 ‘가오’가 살 수 없는 물건이었다. 디씨나 마블 캐릭터라도 그려졌다면 팬심으로 쓰는척 할 수 있겠는데 이건 도저히 변명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산 물건을 어쩌겠는가? 게다가 정말 지갑을 꺼낼 일도 없게 된 터라 아무렴 어떻겠느냐고 쓰기 시작했는데, 한 번 써보니 뒷주머니에 넣고 깔고 앉아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편해서 금방 만족하게 되었다. 이제는 지갑이 무거워 짜증난다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권하고 싶을 정도다. 


가오가 사는 지갑은 골반을 파괴한다.


여기서 잠깐 지갑이라는 물건의 무게를 짚고 넘어가자. 내가 사용하던 평범한 가죽 반지갑은 측정해보니 약 75그램이었다. AA건전지 하나의 무게가 약 23그램이니까 지갑만으로 건전지 세 개 이상을 들고 다니는 셈이다. 거기에 카드가 한 장에 약 5그램이다. 퍽 가벼운 것 같지만 온갖 카드에 회원증 따위를 추가해서 8장쯤 있다고 치면 40그램이니 그리 가볍다고 할 수도 없다. 추가로 지폐가 1그램정도니까 10장 정도 있다고 가정하면 10그램으로, 지갑의 무게는 총 125그램 내외인 셈이다. 물론 평범한 반지갑이 이 정도니까 동전이 들어가는 장지갑을 쓴다면 200에서 300그램은 충분히 나오지 않을까? 항상 갖고 다니니까 실감이 나지 않을 뿐이지 건전지 열 개 정도를 외출할 때마다 주머니에 갖고 다닌다고 생각하면 슬슬 덜어내고 싶어진다. 심장의 무게가 250~300 그램이라고 하니, 고작 가끔 쓸 수도 있다는 이유나 ‘없어보이지 않기 위해’ 심장 반 개에서 한 개를 더 갖고 다닌다는 계산이다. 


반면 새로 산 지갑의 무게는 제작사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약 8.5그램이니 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생이 좀 깔끔해진 듯한 기분마저 든다.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역시 없어보인다는 것인데, 내 경험상 정말 돈이 많은 사람은 늘 현금이 없었던지라 지갑이나 내용물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있어 보이든 없어보이든 본질적으로 자랑할 돈이 없는 게 사실이기도 하고.


아무튼 중국은 이제 구걸조차 전자화폐로 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처럼 한국도 지갑의 중요도가 점점 낮아져서 주머니가 가벼워지길 바란다. 각종 스마트 기기 때문에 점점 소지품이 무거워지는데 지갑이라도 가벼워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던 때쯤 지갑이 너무 무거워서 짜증난다던 어머니가 내 지갑을 보고 가벼워서 좋겠다고 하시는 통에 내 것을 드리고 집안에 남아돌던 가죽제 머니클립을 쓰게 되었다. 위에 새 지갑의 무게를 직접 측정해서 쓰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쓰고 있는 지갑의 총 무게는 약 80그램이 되었다. 원래 무게가 약 48그램이니까 매일 약 40그램의 효도를 하게 된 셈이다. 앞으로도 이것을 쓰면서 매일 효도의 무게를 느낄 것인지, 아니면 새 지갑을 또 살 것인지 고민스럽다. 아무튼 이제 지갑은 멋이 있든 없든 가벼운 게 최고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지퍼백을 사용하면 가볍기도 하고 뭔가 증거품을 빼돌려 쓰는 부패 형사처럼 사연이 있어 보이지 않을까?









광고

여전히 책을 팔고 있답니다.

여행기와 단편소설 https://ridibooks.com/author/21662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 https://ridibooks.com/v2/Detail?id=505008607

매거진의 이전글 완벽한 신발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