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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Nov 22. 2017

완벽한 신발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를 보면 아버지가 주인공에게 매년 생일마다 신발을 선물해줬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부러운 한편으로 상당히 피곤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발이라는 건 남이 사와서 옛다 하고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발이란 대동소이할 것 같아도 저마다 다 다르게 생긴데다 신발에는 걸을 때마다 체중이 실리니까 본인이 직접 신어보고 고르지 않았다간 불편해서 심각한 고통을 겪을 수 있다. 그러니까 영화 자체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사실 “스토커”의 주인공은 선물을 받을 때마다 “와우, 아빠, 너무 멋져요! 사랑해요!” “하하하, 녀석, 호들갑은. 어서 신어보렴.” “어… 근데 이거 좀 안 맞는데요?” 하는 대화를 나누고 신발 가게까지 차를 타고 가서 교환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쳤을 게 틀림없다. 아빠가 딸에게 구두를 선물하는 장면 자체는 감동적이고 멋지지만, 그 감동을 위해서 신발 가게 주인까지 그 감동에 억지로 휘말려 매번 다시 찾아올 걸 알면서도 웃는 얼굴로 구두를 잘 포장해서 팔았을 거라고 생각하면 역시 가슴이 아려온다. 신발은 신을 사람이 신어보고 골라야 한다.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사실 최근에 어머니께서 홈쇼핑 광고를 보다가 충동적으로 세 켤레나 산 운동화 중 내 것만 영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운동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라 사양했어도 됐는데, 봄에 여행을 갔다가 트랙킹화를 하나 버리기도 했고, 깔끔한 운동화가 하나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으며, 그리고 줄 때 받는 것도 효도의 일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사자고 해버렸다. 문제는 그 결과가 영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디자인도 깔끔하고 잘 맞기도 했는데, 발 볼이 넓은 탓에 한참 신고 나서야 불편하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측정해보니 이 운동화는 대략 6000보를 걷고 나면 운동화에서 고문기구로 돌변해서 오른쪽 새끼발가락을 잘근잘근 씹어댄다. 집 근처에 잠깐 나갔다오는 게 아닌 이상 사람이 어딜 갔다 하면 6000보는 넘게 걷게 되어 있으니, 이 운동화는 거의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환불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2006년에도 이와 비슷한 낭패를 본 적이 있다. 명동에 놀러나갔다가 캔버스화를 파격세일하는 모습을 보고 충동적으로 사버린 것이다. 이 운동화도 새끼발가락 파괴자라는 게 밝혀져 양말을 신지 않고 시장에 가야 할 때 신는 긴급 외출용으로 배정되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몇 년 전부터 길이 들었는지 그래도 신을만 해졌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오락실의 ‘던전 드래곤’에 나오는 저주받은 검과 비슷하다. 사용할 때마다 지독한 고통을 동반하지만,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저주가 풀려 쓸만해지는 물건이라고나 할까……. 물론 캔버스화가 전설의 검처럼 빼어난 성능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런 전력이 있는지라 이번에 받은 운동화도 섣불리 처분하지 못하겠다. 영국 왕실에는 새 신을 먼저 신어서 길들이는 담당이 있다는데 그런 서비스가 따로 있어도 괜찮지 않으려나.


몇달 전에는 나이키에서 대폭 할인 행사를 하기에 작업하면서 편하게 신을 운동화를 주문했다. 발등 쪽이 매쉬로 되어 있어서 통기성이 아주 빼어나다기에 크게 기대했는데, 막상 도착한 것을 보니 사이즈가 좀 작았다. 그래서 일주일 넘게 걸려서 교환을 받은 다음, 나의 운동화 라이프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신나게 신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 발 안쪽에 이상한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세히보니 오른쪽 신발 안쪽의 재봉 상태가 엉망이었다. 왼쪽은 깔끔하게 줄을 맞춰놓았는데 오른쪽은 한 부분에 실이 잔뜩 엉켜 있었던 것이다. 사막에서 자고 일어나 부츠 안에 전갈이 들어있나 살펴보는 경우가 아니면 신발 안쪽이란 잘 살펴보지 않는 법이니까, 이것도 신고 돌아다녀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결함이었다. 결국 매장까지 찾아가 직원에게 보여주고 환불 요청을 해서 한 달만에 돈을 돌려받았다.


신발을 신어보자마자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면 그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고 보면 옛날부터 일반 운동화는 항상 잘 맞지 않았다. 가죽이 아닌 신발을 만족스럽게 신은 기억이 도무지 없다. 언제부턴가 늘 캐주얼한 구두나 가죽 운동화만 신고 살았고, 그렇게 산 신발중에 맞지 않아서 불편한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가죽신이 아니면 발이 거부하는 것일까? 여간 까다로운 녀석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이렇게 까다로운 발의 소유자는 신발 고르는 데 신중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산 신발은 열심히 아껴 신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사람이라는 게 편한 신발만 계속 신기 마련이라 신발이 하나씩 금방 소진되어 버린다. 나는 매년 약간 추워지면 2011년쯤에 산 호킨스의 가죽 운동화만 줄기차게 신고 있는데, 맹세코 내가 지금껏 만난 신발 중에 가장 편하고, 앞으로도 이 만큼 편한 신발을 찾을 자신이 없다 싶을 정도로 편해서 그럴 수밖에 없다. 다만 문제는 이렇게 즐겨 신다보니 결국 바닥이 다 닳아서 비만 오면 쭉쭉 미끄러져 생명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ABC 마트에서 밑창 수선을 알아봤지만 불가능하다기에 인터넷에서 잘라 쓰는 밑창과 전용 본드를 사서 직접 수선했다. 그보다 경제적이고 믿을만한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끼는 신발을 다시 안전하게 만드는데는 성공했는데, 고무 밑창을 덧댄 것이라 신발이 좀 무거워졌고, 수선 방법이 잘못된 것인지 끝부분이 떨어지곤 해서 오늘도 접착제를 다시 발라야 했다. 곡면에 고무 밑창을 잘 붙인다는 게 영 쉽지 않은 일인 데다 깔끔하게 붙이기도 어려워서 ‘이쯤 되면 새로 사고 말지’ 라는 생각을 당연히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검색해보니 이 신발은 단종되었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 떠나간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인기 없는 신발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팔 때 평생 신을 만큼 사놨으면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사람이란 신발을 살 때 ‘이게 내 인생 최고의 신발이 될 지도 모르니까 잔뜩 사서 두고두고 마음껏 신어야지!’ 같은 생각은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돌이킬 기회가 주어진다는 법도 없으니, 최대한 아껴 신고 수선해서 신다가 더 이상 손쓸 길이 없으면 그때는 떠나보내고 새 신발을 찾는 것이 발과 신발의 순리인 셈이다.


하지만 신발이라는 건 정말 신고 한참 돌아다녀보기 전에는 자신과 잘 맞는지 알 길이 없다. 발 모양이 다르니 남이 아무리 극찬을 해도 딱히 참고가 되지 않는다. 끝내주게 멋지고 편안한 것 같아도 뭔가 계속 거슬리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멋지지도 않고 엄청 편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신다 보면 점점 멋이 나고 편해서 몇 년이고 즐겨 신는 경우도 있다. 이것만은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100 퍼센트 딱 맞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여러 신발을 신어보면서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이 어떤 것인지 최대한 상세히 익혀두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하지만 과연 정말 마음에 쏙드는 신발을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없다. 그러니 여러분, 잘 맞는 신발이 있으면 최대한 아껴 신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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