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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Feb 21. 2018

게임에서까지 헤매고 싶지 않다

옛날에는 분명 나름대로 코어한 게이머였다. 앉아서 게임을 시작했다하면 제법 악착같이 붙어서 진행했고, 어렵다 어렵다 해도 결국은 엔딩을 보곤 했다. 난해하기 짝이 없어서 도저히 어떡하면 좋을지 모를 액션 어드벤처 게임도 어지간해선 공략집을 보지 않고 해치웠고, 게임을 쉴 새 없이 서너 시간 계속 하는 건 당연한 일에 가까웠다. 직접 지도를 그리거나 히로인이 좋아하는 것을 일일이 시험하고 기록해서 콘텐츠를 남김없이 감상하기도 했다. 그때가 바로 내 게임 인생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하루키의 소설을 보면 성적으로 성숙해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시기가 있다고 하는데(그런 게 정말 있기나 한지는 둘째치고), 아무튼 나로서는 그때가 게임적으로 가장 성숙한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게임은 대부분 손에 넣어서 아쉬울 것 없이 완벽하게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성욕이 감퇴하는 것처럼, 게임 욕구 역시 그런 성숙기를 지나면 내리막길을 걷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요즘들어 하고 있다.


물론, 갑자기 어른이 되어 ‘게임? 어휴, 그런 건 애들이나 하는 거지. 유치하긴...’ 이런 시각을 갖게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게임은 좋아하고, 기회만 되면 계속 하고 싶다. 하지만 마음이 영 따라주지 않는다. 일단 이래저래 여유를 잃어버리면서 느긋하게 대작 패키지 게임을 할 시간이 없어졌는데, 그렇게 모바일 게임만 조금씩 하면서 살다가 문득 생각해 보니 대작을 하지 않는다고 딱히 인생이 완전한 잿빛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럭저럭 살아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여행이 그렇듯이 게임도 대단히 멋진 경험이지만, 안 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낮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요소였던 것이다.


게다가 시간적인 문제로 흥미가 생긴 게임을 다 해볼 수도 없게 되었고, 그래서 게임을 엄선하다 보니 점점 취향이 까다로워졌다. 어지간히 취향에 잘 맞는 게임이 아니면 만족하고 계속 즐길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당연히 재미있게 했을 게임도 이제 성에 차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건 좀 괴팍한 변화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예를 들자면 언차티드 시리즈도 그런 변화에 피해를 본 작품이다. 이것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처럼 화려한 화면과 영화적인 연출, 스토리를 자랑하는 대작인데, 예전에는 정말 끝내주는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보물을 찾아가며 퍼즐을 푸는 어드벤처 요소와 주인공을 방해하는 적들을 닥치는 대로 쏘아 죽이는 액선 요소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개인적으로 ‘인생작’ 카테고리에 넣어 두었다. 그래서 아직 해보지 못한 1과 2까지 한꺼번에 사버렸는데, 막상 게임을 산 뒤로 시간이 좀 지나자 취향이 변해서 손대지 못하고 있다. 액션은 참 좋은데 이제 어드벤처 따위 전혀 반갑지 않은 것이다. A에서 B지점까지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상자를 쌓아 올리고 절벽을 타는 과정이 영 귀찮은 짓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저 놈을 어떻게 죽일까’ 는 변함없이 군침을 흘리며 생각할 수 있고 심지어 성공하고도 몇 번씩 다시 하는데, ‘저기까지 어떻게 가지?’ ‘무슨 모양을 만들면 이 문이 열릴까?’ 같은 건 영 생각하고 싶지 않다. 두뇌가 늙고 게을러진 탓일까?


드넓은 세계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 떠나기엔 좀 피곤하다


게다가 요즘 최고의 인기라는 ‘슈퍼 마리오 오딧세이’와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 역시 하다 보니 영 피곤해졌다. 슈퍼 마리오 오딧세이는 드넓은 스테이지들을 돌아다니면서 쿠파의 졸개들을 잡고 온갖 곳에 숨겨진 파워문을 찾는 것이 주요 콘텐츠인데, 이것은 ‘저기까지 어떻게 가지’에 덧붙여 어디 숨겨져 있는지도 모를 파워문을 찾아다녀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넓고 어딜 가도 뭔가 새로운 게 튀어나오는 세상이란 분명 멋진 것이지만, 보상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탐색은 솔직히 작가 생활로도 족하다. 게임에서까지 그런 험난한 짓을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30분만 할 생각으로 붙잡은 게임에서 10분 15분씩 뭐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장소를 빙빙 돌고 있자면 슬슬 분통이 터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엄청난 호평을 받은 젤다의 전설 역시 맨정신으로 계속 붙들고 있을 게임은 아니었다. 시작하면 곧바로 정체불명의 노인이 시키는 대로 사당들을 찾아다니며 온갖 퍼즐을 클리어해야 하는데, 퍼즐은 둘째치고 사당을 찾는 것부터 당장 문제였다. 높은 탑에 올라가 알아서 사당을 잘 찾아보고 뭘 모아오면 중요 아이템을 주겠다는데, 나로서는 도무지 사당을 찾을 수가 없었다. 탑에서 빨리 내려오려다 조작 실수로 추락사한 게 세 번쯤 된다. 이 노친네를 쳐 죽이고 아이템을 빼앗을 수 없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나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도 길을 찾지 못해서 때려치운 사람이다. 제발 길을 알려달란 말이다. 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길을 헤매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건 인생으로도 족하다.


취향이 이 정도로 괴팍해지고 성질이 급해졌으니, 이제 재미나게 할 수 있는 것은 액션 게임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 실제로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한 게임은 SF 호러 액션 게임인 ‘데드 스페이스’ 시리즈였다. 우주선, 기지 등의 폐쇄 공간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괴물들을 산업용 공구로 쉴 새 없이 쏘아 죽이는 편이 정처없이 떠돌며 뭘 수집하는 것보다 마음 편하고 즐겁다. 특히 이 게임의 멋진 점은 길을 헤맬 수가 없다는 것인데, 버튼만 누르면 다음 목적지를 아주 선명하게 표시해 주기 때문이다. 지도에 점만 찍어주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갈 길이 눈에 뻔히 보이도록 밝은 광선으로 그려준다. 그것만 따라가면 다음 목적지든 상점이든 세이브 포인트든 찾아낼 수 있으니, 여기저기 뒤적이며 아이템을 찾은 뒤에도 곧장 가야 할 길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토록 친절할 수가 없다. 내가 고민할 것은 이 앞에서 튀어나오는 괴물을 뭘로 어떻게 쏘아 죽일까 하는 것 뿐이다. 이렇게 되어 있으니 헤맬 것 없이 다음 세이브 포인트까지 딱 20분만 하면서도 속이 꽉 찬 사투를 즐겼다고 만족할 수 있었다. 요는 내 관점에서 번거롭고 귀찮은 것은 거의 없이 맛난 것만 계속 즐기는 게임이었던 셈이다. 덕분에 데드 스페이스 2는 똑같을 걸 알면서도 세 번인가 네 번을 했다. 그 뒤에 게임 불감증에 걸려버리긴 했지만......


아무튼 예전에는 레일을 따라가는 듯한 게임은 시시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오히려 그게 마음 편하다. 헤메고 싶지 않고, 어떤 보상을 얻으려고 안달하고 싶지 않다. 오랜 시간의 탐색과 방황 끝에 달콤한 열매를 쟁취하는 대신, 뻔한 길을 걸으며 말초적으로 자극적인 쾌락만 누리고 싶다. 물론 이건 도둑놈의 심보지만, 게임에서 그런 심보를 갖는게 딱히 죄는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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