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Apr 11. 2018

피아노 학원은 왜 다녔을까?

스티브 잡스는 전혀 상관 없을 것 같은 점들이 미래에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진다고 멋진 연설을 했고, 실제로 그의 행보 역시 그의 연설을 뒷받침했다. 컴퓨터 기술과 도통 상관 없을 것 같았던 캘리그래피 수업을 들은 덕에 맥 시스템에 ‘서체’라는 개념을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에야 컴퓨터에서 다양한 서체를 활용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컴퓨터와 서체란 반도체와 서커스처럼 아무 관련도 없고, 관련지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과연 천재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싶은 대목이다. 물론 그가 만들어낸 아이폰에서 아직도 시스템 서체를 바꿀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대체 애플의 철학은 무엇일까 혼란스럽지만....... 


아무튼 인생에서 별 쓸모 없는 점들을 많이도 찍고 산다는 생각이 든다. 잡스가 서체라는 점을 연결했던 것과는 달리,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연결할 가능성이 눈곱만큼도 없는 점들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자면 어릴 때 다녔던 피아노 학원이라든가.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때 집 근처의 피아노 학원을 그럭저럭 오래 다녔다. 체르니를 하다 그만뒀던 것 같은데, 딱히 다니기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음악의 기쁨에 취해 있지도 않았다. 그냥 가라니까 가는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딱히 선생님을 존경하지도 않았고 대단히 친한 친구가 생기지도 않았는데, 그냥 그렇게 오가면서 지루한 멜로디를 반복하며 진도 카드에 허위 기록을 작성하거나 책장에 비치된 개신교 잡지의 야구 만화를 뒤적였다. 그 시절에는 그냥 그러는 게 맞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내가 잡스처럼 훌륭한 사람이었다면 아마 그렇게 인생에서 하등 쓸모없어 보이던 부분을 어떻게든 살려내서 대단한 발명이나 발견을 했을 테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 ‘점’은 그냥 연결되지 않은 점으로 남아서 고립되고 말았다. 어릴 때 배운 것은 오래 간다는 것도 완전히 헛소리라, 피아노 치는 법은 물론이고 악보 보는 법조차 빠르게 잊어버렸다. 하다못해 학원을 계기로 음악이라도 좋아하게 되었으면 모르겠는데, 그때는 음악조차 찾아 듣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내가 별 쓸모없는 학원을 다닌 게 그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머니는 그 시절에  어쩐지 내 예체능 스탯을 중점적으로 찍기로 작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애가 별 쓸모 없는 학원에 다녀도 나쁠 거야 없는 시기였기 때문이지만, 하모니카, 단소, 미술 학원까지 다녔던 것은 좀 과했던 것 같다. 그중에서 실질적으로 쓸모가 있었던 것은 단소 뿐이었다. 학교에서 단소 시험 하나는 잘 쳤던 것이다. 하모니카는 완전히 헛짓이었고, 미술 학원은 미술 시험에 그럭저럭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미술 학원에 다닌 덕에 예전에 못하던 뭔가를 새로이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확인할 길이 없다.
 

(예술을 소비하기도 전에 생산하려고 하면 당연히 잘 되지 않는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흘러 지금은 글을 써서 돈을 벌고 있으니, 그 시절에 보낸 시간이 쓸모 없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느날 갑자기 진로에 회의를 느끼고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려서 두각을 드러낼 것 같지도 않고, 만약 그렇게 된대도 예전에 배웠던 기억이 거짓말처럼 되살아나 도움을 줄 것 같지도 않다. 역시 그때 소설이든 만화든 애니메이션이든 재미난 것을 보고 노는 편이 직업적으로 유리했을 것 같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돈을 벌게 된 뒤부터 여가 시간에 느긋하게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 연주를 하는 것을 막연한 꿈으로 갖게 되었다. 정말로 좋아하던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되니 돈벌이와 아무 상관도 없는 예술을 즐기고 싶어진 것이다. 딱히 그런 게 필요 없던 시기에 예술을 기계적으로 배우고, 이를 악물고 돈벌이에 필요한 기술을 배워야 하는 시기에 거꾸로 예술을 즐기고 싶어지다니 생각해보면 참 얄궂은 일이다.  


그렇다면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그럼 돈벌이에 필요한 기술을 어릴 때 배운 걸로, 예술을 지금 느긋하게 즐기는 걸로 바꿔 줄까?’하고 제안한다면, 망설임 없이 그러자고 할 것인가? 물론 당장 이득이 될 것 같긴 하지만, 그것도 뭔가 아닌 것 같다. 자신이 어린 시절 내내 맞춤법이나 원고 교정하는 법, 소설 작법이나 일본어를 공부했다고 생각하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오싹하고 애처롭다.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대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는 정도가 딱 적당할 것 같다. 이래서야 초월적인 존재가 까다로운 자식이라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지만...... 역시 연결되지 않은 점도 적당히 갖고 사는 게 좋은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