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쓸모를 다한 것들이 건네는 위로
AI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전이었습니다. 서울의 한 오래된 호텔 로비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설치된 빨간 전화부스를 마주했습니다. 화려한 트리와 조명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빨긴색 직육면체가 유독 제 시선을 사로잡더군요.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안의 풍경은 더욱 낯설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목소리를 전해야 할 수화기는 보이지 않고, 그 자리를 턴테이블과 헤드폰, 손때 묻은 LP판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화를 걸던 공간이 마치 음악을 듣는 공간처럼 꾸며져 있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연말이 지나면 철거될 시즌 장식이었습니다. 실제 전화부스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전화부스 형태만 빌려 만든 모형이었죠. 하지만 저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그 장식물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그 순간을 프레임 안에 담았습니다.
기능이 멈춘 자리에 깃든 의미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된 지금, 공중전화 부스는 거리에서 사라진 유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호텔은 그 사라진 형태를 로비 공간으로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실제가 아닌 모조품으로, 기능이 아닌 장식용으로 말입니다. 부스 안에 배치된 턴테이블과 LP판 역시 실제로 음악을 재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음악을 듣는 공간처럼 보이도록 연출한 장치에 불과했습니다.
이제는 아무런 쓸모도 없어진 전화 부스 공간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로웠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쓰임새가 사라졌기에, 비어 버린 그 자리를 사람들의 상상과 향수가 채우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연결되던 치열한 공간의 기억이 이제는 낭만적인 시각적 풍경으로만 남은 셈입니다.
이 장면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마주한 AI 시대의 풍경과 묘하게 겹치기 때문입니다. 효율과 기술, 심지어 고유한 인간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창조의 영역까지 AI에게 내어준 후, 과연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을까요? 어쩌면 저 전화부스처럼 제 역할을 잃은 빈 껍데기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만질 수 있는 것들의 온기
호텔 로비에 있던 전화부스가 시즌이 끝나면 철거될 장식물이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우리는 현재 수많은 ‘일회성 콘텐츠’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AI가 순식간에 생성해 내고, 소비되자마자 사라져 버리는 디지털 이미지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렌즈에 담은 이 한시적인 전화부스는 디지털 데이터와는 다른 무게를 지닙니다. 비록 잠시 머물다 갈 장식에 불과했지만, 그곳에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성(物性)’이 있었고, 잠시 멈춰 서서 들여다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사라짐으로써 존재하는 것들
이제 그 호텔 로비에는 저 빨간 부스가 없을 것입니다. 철거되어 창고 깊숙한 곳에 보관되었거나, 영영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진은 남아 있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실물이 아니고 기능도 없던 장식이 사진 속에서는 가장 실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턴테이블과 헤드폰, 그리고 손때 묻은 LP판의 질감이 오히려 지금 사진 속에서 더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AI가 매끄럽게 만들어내는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가 그리워하게 될 것은 저 빨간 부스와 그 안의 사물들일지도 모릅니다. 완벽하지도, 쓸모 있지도 않지만, 누군가 손수 만들고 장식하며 연출한 사람의 흔적이 묻어 있는 것들 말입니다.
저는 이 사진 프레임 속에 그런 순간을 담아둡니다. 공중전화가 사라진 자리에는 전화부스 모형이 서 있고, 그 안에는 소리를 내지 않는 턴테이블이 놓여 있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 겹겹의 부재(不在)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소중한 무언가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마 각자의 몫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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