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이 바뀌었다고 글을 쓰는 마음이 변할까?
유네스코(UNESCO)는 2011년에 '교육에서의 디지털 문해력(Digital Literacy in Education)'에 관한 정책 브리프(Policy Brief)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단순히 컴퓨터를 다루는 기술을 넘어섭니다.
"디지털 문해력은 단순한 기술 습득을 넘어 삶의 핵심 역량이다. (중략) 이는 개인의 삶의 기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하며, 교사와 학습자, 정책 입안자의 관점에서 디지털 문해력이 교육 제도 내에서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지를 분석한다."
유네스코가 던진 이 엄중한 제언은 제 오랜 화두에 불을 지폈습니다. 사실 저는 미디어 아트 교육을 하며 늘 품어온 의문이 있었습니다. '왜 소수의 전공자들만 이 강력한 창작 도구를 독점해야 하는가? 이 도구들이 펜이나 종이처럼 모든 학생에게 '보편적 도구'로 쥐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늘 머릿속을 맴돌던 이 생각은 2016년 무렵, 대학 강단에 밀려온 '디지털 전환'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비로소 선명해졌습니다. 저는 그 파도에 휩쓸리는 대신, 오랫동안 숙고해 온 '창작 도구의 보편화'에 대한 생각들을 차분히 갈무리하며 다가올 변화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확인한 ‘21세기의 펜’
당시 저에게 포토샵이나 프리미어 같은 어도비(Adobe) 도구들은 매우 익숙하여 마치 오랜 동료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미디어아트나 디자인 전공자가 아닌 이상, 비싼 라이선스 비용과 높은 진입 장벽 때문에 이 도구들은 '남의 세상 이야기'로만 여겨졌습니다.
이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이러한 고민은 저를 2017년 2월 미국 산호세(San Jose) 실리콘밸리로 이끌었습니다. 저는 어도비 본사를 방문하여 관계자들을 만나고, 미국 서부와 동부 지역의 대학들이 디지털 도구를 교육에 어떻게 접목하고 있는지 현장에서 직접 확인했습니다. 그 흐름은 명확했습니다. 디지털 도구는 더 이상 특정 전공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글을 읽고 쓰는 능력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갖추어야 할 ‘보편적 문해력’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그 현장에서 얻은 확신은 2018년, 제가 연세대학교 디지털 익스피리언스 센터(Digital Experience Center)의 센터장을 맡아 감행한 실험의 견고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학교 본부의 과감한 결단과 함께 전공에 상관없이 모든 학생에게 어도비의 창작 도구를 제공하는 일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갑작스럽게 찾아온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전면 온라인 교육 환경은 역설적으로 수 많은 학생들이 디지털 도구를 활용해 콘텐츠를 창작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누군가 물었습니다.
"철학과 학생이나 경영학과 학생이 왜 영상 편집 도구를 배워야 할까요?"
저의 대답은 2017년의 경험을 통해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 교육이 아니라, 21세기의 '펜(Pen)'을 쥐여 주는 일입니다."
과거의 지성인들이 만년필로 자신의 사상을 원고지에 기록했다면,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이미지와 영상, 그리고 인터랙티브한 웹을 통해 자신의 논리를 펼쳐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제가 학부 교양 교과목으로 개설한 강의명이 <Content Writing>이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diting(편집)'이나 'Making(제작)'이 아닌 'Writing(쓰기)'이라 명명한 것은 의도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어도비의 도구는 단순히 멋진 영상을 만드는 기술적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머릿속에 있는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디지털 문법에 맞게 논리적으로 구조화하고, 타인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비주얼 작문(Visual Writing)’의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노코드(No-code) 환경에서 코딩이라는 장벽 없이 자신의 전공 지식과 관심사를 자유롭게 시각 언어와 영상으로 구체화했습니다. 인문학적 성찰은 깊이 있는 영상 에세이로, 사회과학적 분석은 움직이는 인포그래픽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저는 학생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결과물을 보며,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교양(Liberal Arts)’임을 다시 한 번 확신했습니다.
숨 가쁜 이행, 그리고 AI라는 새로운 펜
저의 이 작은 실험은 2022년까지 4년 동안 치열하게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또다시 거대한 해일 앞에 서 있습니다. ‘디지털 리터러시’라는 말이 채 정착되기도 전에 ‘AI 리터러시’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변화의 속도는 현기증이 날 정도입니다. 2018년에 수업을 듣던 학생들이 며칠 밤을 새워 마우스를 클릭하며 만들던 결과물을, 2025년의 학생들은 프롬프트 한 줄만으로 단 1분 만에 만들어냅니다.
도구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해졌고, 기술의 문턱은 완전히 낮아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배움의 자리는 없는 것일까요?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유네스코가 경고한 ‘새로운 문맹’의 의미는 AI 시대에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AI가 답을 대신해 주는 세상에서 ‘무엇을 질문할 것인가’를 모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문맹이기 때문입니다.
도구는 변해도 생각을 표현하려는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술이 쉬워질수록 학생들의 고민은 더 깊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강의실에서 벌어집니다. 과거에는 ‘어떻게(How)’ 구현할지를 두고 골머리를 앓았다면, 이제는 ‘무엇을(What)’ 그리고 ‘왜(Why)’ 표현해야 하는가 하는 훨씬 더 본질적이고 무거운 질문과 씨름하게 된 것입니다.
기존의 다양한 디지털 표현 기술에서 AI 기술로, 우리의 손에 쥔 펜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펜으로 써 내려가야 할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2018년의 수업이 디지털 도구로 ‘나의 상상’을 표현하는 과정이었다면, 2025년의 AI 교육은 ‘나의 안목’으로 기술을 조율하는 훈련에 가깝습니다. AI가 쏟아내는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맥락을 읽고 가치를 선별해 나만의 관점을 세우는 힘, 그것이야말로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끝내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변화의 급류를 건너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구가 깃펜에서 만년필로, 다시 AI로 바뀌었을 뿐 세상과 소통하고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창작의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구의 편리함에 매몰되지 않고 이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켜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급변하는 시대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리터러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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