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남산, 창문 없는 방에서 꾸었던 꿈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개원,그 1년 6개월의 기억

by 김형수

2025년의 끝자락, 한 해가 저무는 길목에 서니 문득 한 숫자가 가슴에 새삼스레 다가옵니다.


'30년' (삼십 년)


제가 강단에서 학생들과 마주한 지 꼭 30년이 되었습니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1995년 3월로 갑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이 처음 문을 연 그해 봄, 우리는 남산 순환도로 변에 위치한 낡은 ‘대원정사’ 건물을 빌려 더부살이를 시작했습니다. 엘리베이터 하나 없이 가파른 계단이 이어지던 그곳. 제 첫 교수 연구실은 그 건물 안에 마련된 창문 하나 없는 임시 조립식 박스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1995년 영상원 초창기 교과목 일람표. 낡은 종이 속에 그 시절의 고민이 담겨 있다.


당시 영상디자인과의 정원은 15명이었으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첫 해엔 단 10명의 학생만 선발되었습니다. 교수는 저 혼자였고, 제대로 된 컴퓨터나 기자재도 전무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비어 있음’이 우리를 서로에게 더 깊이 몰입하게 만들었습니다.



기자재가 들어오기까지 걸린 1년 6개월은 제 인생에서 가장 꿈같은 나날이었습니다.



최첨단 장비 앞에 앉아 기술을 익히는 대신, 우리는 밖으로 나가 돌아다녔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 다니며 당시 열리던 다양한 전시와 공연을 관람했고, 제가 개인적으로 소장했던 최신 CD-ROM 타이틀을 돌려보며 다가올 멀티미디어 세상을 상상했습니다.



교재 구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라, 제본소에서 복사한 <The Scientific Image> 챕터를 나눠주며 “토씨 하나도 빼지 말고 번역해 오라”고 엄격하게 요구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면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와인이 대중화되기 전이었지만, 저는 학생들에게 자주 와인을 사주며 밤늦도록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The Scientific Image』 책 표지


창문 없는 연구실과 가파른 계단, 삭막한 강의실에서 와인잔을 기울이며 나누던 이야기들. 그것은 단순한 수업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체험하는 시간이었으며, 기능(Skill)을 넘어 창작자의 ‘태도’를 다듬는 과정이었습니다.


'기자재가 없었기에' 우리는 오히려 서로의 눈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고, 도구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본질적인 질문들에 매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6년, 두 번째 해가 밝자 믿기 어려운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학과 장비 구입 예산으로 15억 원이 배정되었습니다. 텅 비어 있던 실습실에는 '플레임(Flame)', '플린트(Flint)', '소프트이미지(Soft Image)' 등 당대 최고의 억대 장비들이 들어섰고, 모션 캡처 시스템까지 갖추게 되었습니다. 국내 어느 대학도, 웬만한 프로덕션도 갖추지 못한 꿈의 환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기자재 덕분에" 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상상만 하던 이미지를 현실로 구현하며 비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장비의 윙윙거리는 팬 소리 속에서도, 저는 가끔 그전의 고요했던 1년 6개월을 그리워하곤 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저는 AI라는 ‘새로운 차원의 도구’ 앞에 서 있습니다.


30년 전, 첨단 장비들은 오직 영상원 실습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선택된 소수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다면, 지금의 AI는 다릅니다. AI는 특정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모두의 일상 가장 가까운 곳에서 숨 쉬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책상 위에서,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무한한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기술은 특권에서 일상으로 내려왔고, 장벽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1995년 남산의 창문 없는 연구실이 제게 던졌던 질문은 더욱 유효합니다.


기술이 모든 것을 그려주는 시대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화려한 도구 이전에 ‘무엇을(What)’ 그리고 ‘왜(Why)’ 그려야 하는지를 치열하게 묻던 그 시절의 눈빛이, AI가 일상이 된 오늘날 더욱 그립고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1995년 영상원 영상디자인과 교과목 리스트 일부

[덧붙이는 그 시절 '꿈의 장비'들]

플레임(Flame), 플린트(Flint): 1990년대 중후반, 대당 가격이 수억 원을 호가했던 전설적인 하이엔드 영상 합성 시스템(SGI 기반 워크스테이션)입니다. 당시 일류 광고 프로덕션이나 영화 후반작업 업체에서도 구경하기 힘들었던, 그야말로 '꿈의 장비'였습니다.


소프트이미지(Softimage): 영화 <쥬라기 공원(1993)> 속 공룡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 것으로 유명한, 당대 최고의 3D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입니다.


모션 캡처 시스템(Motion Capture System): 실제 사람의 움직임을 센서로 감지해 디지털 캐릭터에 입히는 최첨단 기술로, 1996년 당시 대학에 이 시스템이 갖춰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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