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하나를 지우는 데 걸린 1년

'문화·미디어'와 '문화미디어'의 차이, 0.1mm의 장벽을 넘다

by 김형수

2025년 12월 30일.

올해의 달력도 이제 단 하루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저무는 해가 창가에 비치는 자리에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올해는 제 교단 인생에서 유독 의미 있는 숫자들이 교차하는 해였습니다.


남산 자락에서 시작한 한예종 영상원 개원 30주년, 신촌 연세대 영상대학원(현 커뮤니케이션대학원) 25주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정을 쏟은 연세대 글로벌인재대학(GLC) 설립 10주년.


이 숨 가쁜 레이스를 마치고 명예교수의 이름으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문득 선명하게 남은 기억 하나가 떠오릅니다. 그것은 엄청난 예산 확보 투쟁도, 거대한 담론의 충돌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글자 사이에 찍힌 작은 ‘점(·)’ 하나를 지우기 위해 견뎌야 했던 지루한 시간이었습니다.


‘문화’와 ‘미디어’ 사이, 0.1mm의 장벽


연세대학교 글로벌인재대학(GLC)에서 ‘문화·미디어/문화미디어' 전공 책임교수(2018~2023)를 맡았던 시절의 일입니다. 전 세계에서 모인 학생들에게 책상 앞에서만 이루어지는 이론 수업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방식이었습니다.


매 학기 30여 개의 교과목이 개설되는 이 과정에서 제가 추구한 것은 문화와 미디어 트렌드를 실시간으로 융합하는 ‘경험 교육’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직접 콘텐츠를 제작하고, 기술을 활용해 문화를 새롭게 해석하는 생생한 현장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행정 시스템에 등록된 전공 명칭에는 작지만 견고한 장벽이 하나 있었습니다.


[문화·미디어 전공]

‘문화’와 ‘미디어’ 사이에 찍힌 저 가운뎃점(·) 하나.


점이 존재한다는 것은 '문화'와 '미디어'가 별개로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결합'이나 '나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는 두 요소가 서로 녹아들어 경계가 사라지는 '화학적 융합'이었습니다.


더욱이 디지털 환경에서는 '점' 하나가 치명적이었습니다. 구글 등 검색 엔진에서 특수문자가 포함된 명칭은 제대로 검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걸고 국경을 넘어온 청년들에게 검색조차 되지 않는 전공을 안겨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두가 동의한 길을 막아선 ‘점’ 같은 사람


저는 학교 본부에 정식으로 요청했습니다.


"가운뎃점을 지워주십시오. 이 전공의 이름은 '문화미디어'여야 합니다."


당시는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이 급격히 확산되던 시기였습니다. 연세대에선 모든 학생에게 어도비(Adobe) 창작 앱을 제공하며 디지털 리터러시를 장려할 때였습니다. 학생들은 이미 포토샵과 프리미어를 활용해 두 세계를 넘나들고 있었지만, 행정 시스템에선 전공 명칭인 ‘문화’와 ‘미디어’ 사이에 점 하나를 찍어 놓고 있었던 셈입니다.


사실상 거의 모든 교무위원들이 동의하는 그 변화를 단 한 사람이 막아섰습니다.


논리적인 이유도, 대안도 없었습니다. 미래를 향해 날개를 달려는 시도에 대해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느냐”며 막연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그의 모습은 마치 ‘문화’와 ‘미디어’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그 ‘점(·)’과 꼭 닮아 있었습니다.


새로운 미래로의 전환을 거부하고 구분 짓기를 좋아하는 그 ‘점 같은 존재’ 때문에, 당연한 상식이 통과되는 데 무려 1년이 걸렸습니다. 한 사람의 설명할 수 없는 훼방이 시스템 전체의 시계를 멈춰 세운 것입니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


누군가는 그깟 점 하나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문화·미디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한, 학생들은 무의식적으로 두 가지를 분리해서 생각할 것입니다. 그 잘못된 프레임을 깨기 위해 그 답답한 시간을 기꺼이 견뎌야만 했습니다.


계절이 네 번 바뀌고 나서야 비로소 그 끈질긴 장벽을 뚫고 점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문화 미디어'


0.1mm의 간격이 사라지자, 두 단어는 비로소 딱 붙어 하나의 고유한 개념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출처_GLC 문화미디어 전공 홈페이지


멀티모달(Multimodal)의 시대, 점을 지워야 하는 이유


2025년 12월의 끝자락, 세상은 텍스트, 이미지, 영상의 경계가 허물어진 ‘멀티모달 AI’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프롬프트 한 줄로 이미지와 영상이 생성되는 세상에서, ‘장르의 구분’을 의미하는 가운뎃점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1년은 단순한 행정 지연이 아니라 다가올 AI 시대를 온전히 맞이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통과의례였습니다.


물론 아쉬움은 남습니다. 1년간 지체되는 동안, 제도가 바뀌기 전에 입학한 학생들은 졸업장에 여전히 ‘문화·미디어’라는 점 찍힌 전공명을 안고 졸업해야 했습니다. 불필요한 훼방으로 제자들에게 작은 상처 하나를 남긴 셈이라, 스승으로서 여전히 미안한 마음입니다.


한예종 30년, 영상대학원 25년, 그리고 GLC 10년.


돌이켜보면, 그것은 다가올 AI 시대에 생존하기 위한 ‘디지털 문법’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매일 AI와 대화하고 프롬프트를 입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AI 리터러시(AI Literacy)'란 단순히 도구를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고정관념, 즉 내 생각 속에 찍혀 있는 수많은 '구분의 점'들을 지워내는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문화와 기술, 텍스트와 이미지, 인간과 AI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일.


그 유연한 사고야말로 일상에서 AI를 창의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가장 확실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제가 고집스럽게 지워낸 그 한 점이, '문화미디어'를 전공하는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경계 없는 상상력'을 위한 작은 이정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창조는 언제나 그 점이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GLC 10주년 파티


[덧붙이는 글: 연세대 글로벌인재대학(GLC)은?]

연세대학교 글로벌인재대학(GLC)은 전 세계 39개국에서 온 약 1,200명 넘는 학생들이 재학 중인 융합 교육의 산실입니다.


국제통상, 한국언어교육, 바이오생활공학, 응용정보공학, 그리고 본문의 배경이 된 문화미디어까지 총 5개의 전공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학생들이 전공의 경계를 넘어 자유롭게 소통하며, '점(·)'이 사라진 자리에서 새로운 미래 가치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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