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되지 않는 날들의 안부

2007년 5월 1일의 그림

by 김형수

2026년 1월 8일, 새해를 맞아 묵은 짐을 정리하다 책장 구석에서 한 장의 종이를 발견했습니다. 빛바랜 공책 낱장 위에 검은 펜으로 쓱쓱 그려 내려간 익숙한 얼굴이었습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매와 마이크를 쥔 손, 그리고 제 얼굴 특징을 고스란히 담아낸 옛 모습이었습니다.


학생이 그려준 나의 모습_2007년 5월 1일


종이 한 귀퉁이에는 ‘2007년 5월 1일’이라는 날짜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40대 후반이던 제가 열정적으로 강의하던 시절의 기록입니다.


이름 모를 제자, 남겨진 안부


그림 옆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교수님, 아프지 마세요"라는 다정한 안부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저를 웃음 짓게 만든 한 마디가 덧붙여져 있었죠.


"교탁 아래가 언제나 궁금해요"


강의 중 열변을 토하는 상반신만 보이다 보니, 학생들의 눈에는 가려진 교탁 아래가 마치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졌나 봅니다.


분명 제가 강단에 서 있던 순간이었고, 누군가 저를 빤히 바라보며 이 그림을 그렸을 겁니다. 수업이 끝난 후 수줍게 머뭇거리거나 씩씩하고 밝게 웃으며 이 종이를 건넸겠지요. 그런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 그림을 그려준 사람이 누구였는지, 어떤 수업 시간이었는지, 그리고 그날 제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말입니다.


AI도 알려줄 수 없는 기억의 공백


우리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AI에게 묻고, 흐릿한 과거의 사진도 기술로 선명하게 복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19년 전의 낡은 종이 앞에서는 최첨단 기술도 무력해집니다. 이 그림의 화풍을 분석하거나 사용된 도구가 무엇인지 알려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이 그림을 그린 학생이 누구냐?”는 제 질문에는 답할 수 없습니다. 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 순간의 인연을 기술이 대신 찾아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데이터로 저장되지 않은 기억은 이처럼 쉽게 사라집니다. 긴 교직 생활 동안 스쳐 지나간 수많은 학생 중 한 명이 남긴 이 따뜻한 흔적은 이제 출처를 알 수 없는 ‘기억의 유물’이 되었습니다.


교탁 아래의 비밀과 전하지 못한 감사


학생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교탁 아래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아마도 낡은 교재 몇 권과 분필 가루가 묻은 지우개, 혹시 모를 비를 대비한 우산 하나가 전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학생의 눈에는 그곳이 교수님의 비밀스러운 공간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아프지 마세요"라던 그 학생의 걱정 덕분인지, 저는 2026년까지 무탈하게 살아남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고마운 마음의 주인은 제 기억의 서랍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 그림을 다시 접어 서랍 가장 깊은 곳에 넣어둡니다. 비록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19년 전 5월, 저에게 다정한 안부를 건네준 그 학생의 마음만은 오롯이 느껴집니다. 데이터로 검색되지 않는, 그래서 더 애틋한 아날로그의 기억이 오늘따라 더욱 그립습니다.

나의 기억 속 2007년 강의실 풍경_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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