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랑도 술 마실 줄 아느냐?
서른 해 전, 1995년 봄의 서울은 다가올 디지털 시대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거장 백남준을 처음 만났다. 이제 막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의 문을 연 젊은 교수였던 나에게, 그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3D 컴퓨터 그래픽스 할 줄 알아?" 대가의 입에서 나올 법한 심오한 철학이 아니라, 마치 기술 자격증 시험 문제처럼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1995년은 3D 그래픽스가 전문 교육과 영상 제작 현장에 막 도입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전문 그래픽 워크스테이션이 수천만 원을 호가하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3D 컴퓨터 그래픽스는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나 볼 수 있는 신기한 마법 같은 기술이었다. 하지만 백남준은 이미 그것이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표현 도구가 될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지만, 그는 단순히 그래픽 툴의 사용법을 물은 것이 아니었다. 시대의 가장 새로운 언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그 낯섦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놀 준비가 되었는지를 확인한 것이었다.
만약 그가 인공지능이 세상을 뒤흔드는 지금 이곳에 있다면, 어떤 질문을 던졌을까? 아마도 "AI로 어떤 작업을 할 줄 아느냐?" 같은 뻔한 질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텔레비전을 쌓아 조각을 만들고, 첼로를 연주하듯 비디오를 다루었던 그답게, 훨씬 더 장난스럽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 말이다. "김 교수, AI랑도 술 마실 줄 알아?"
그의 질문 방식은 언제나 새로운 기술을 단순한 도구로 보지 않았다. 그는 기술을 우리 일상의 가장 인간적인 순간들과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생각했다. 과거 한 한국 기자가 ‘비디오 아트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막걸리를 잘 마시면 돼”라고 답한 적이 있다. 와인도, 위스키도 아닌 막걸리. 그 단어 선택에는 기술을 서구의 고급 문화가 아닌, 우리 삶의 가장 서민적이고 일상적인 풍경으로 끌어내리려는 그의 마음이 담겨 있다. ‘AI와 술을 마신다’는 나의 상상 역시 이 ‘막걸리 철학’의 연장선에 있다. 백남준에게 기술이란 결국 사람들과 어울리고 세상을 즐기는 또 하나의 놀이판이었던 것이다.
AI는 이미 수 분 만에 학술 논문의 초안을 완성하고, 몇 번의 키워드 입력만으로 정교한 이미지를 생성하며, 장르와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음악을 작곡한다. 그 결과물들은 때로 인간이 만든 것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하지만 백남준은 그 결과물의 정교함보다 우리가 그 기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에 더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AI와 함께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느냐”는 질문은 결국 “너는 새로운 기술을 도구가 아닌 동반자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물음과 같다.
사실 우리는 이미 AI와 기묘한 동거를 시작했다. 우리는 AI에게 번거로운 일을 맡기면서도, 그 예측 불가능한 반응에 때로는 당황하고 때로는 즐거워한다. 완벽한 명령 수행을 기대했다가 엉뚱한 결과에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이쯤 되면 AI는 명령에만 복종하는 완벽한 도구가 아니라, 도구와 동반자 사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통제할 수도, 완전히 신뢰할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 속에서 점점 더 깊숙이 관계를 맺어가고 있다.
AI와의 술자리를 상상해보자. AI는 데이터베이스를 참조해 가장 근사한 건배사를 제안하고, 막힘없이 해박한 지식과 유머를 쏟아낼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흐르는 어색한 침묵의 공기,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의 울림, 말없이 주고받는 시선의 따스함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백남준은 바로 그 ‘간극’을 사랑했을 것이다. 전자기술이 닿을 수 없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예술과 유머가 시작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질문을 농담처럼 받아들이면서도, 나는 다시 진지하게 묻는다. "나는 AI와 함께 웃을 수 있는가? 그 웃음 속에서 인간만의 감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 기술을 두려워하거나 숭배하는 대신, 그 불완전함을 놀이의 대상으로 삼아 함께 어울리는 태도. 어쩌면 새로운 창조성은 바로 거기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만약 지금 백남준이 나를 본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3D는 이제 됐고, AI랑 침묵도 즐길 줄은 알아야지." 그리고는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