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Minutes가 보여준 AI 예술의 민낯
출처: CBS 60 Minutes, 시즌 58 에피소드 21, "Is That Art?", 2026년 2월 22일 방송. 리포터 샤린 알폰시(Sharyn Alfonsi).
지난 일요일, CBS 60 Minutes가 AI 예술을 정면으로 다뤘다. 부제가 "혁명인가, 속임수인가(Revolutionary or a gimmick)." 13분 안에 네 사람의 목소리가 부딪혔는데, 정작 드러난 것은 예술의 미래보다 권력의 현재였다.
네 개의 목소리
리포터 알폰시가 찾아간 곳은 LA에 있는 레픽 아나돌의 스튜디오다. 터키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마흔 살. 게임 컨트롤러를 쥐고 AI를 실시간으로 조작하며 NASA의 지구 사진 2억 장을 학습시킨 몰입형 영상을 선보였다. 거울과 LED로 둘러싸인 공간, 목에 건 장치에서 AI가 만들어낸 비 냄새와 꽃향기가 퍼진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기계 반, 인간 반의 협업"이라 했고, 데이터를 "마를 필요 없는 물감"이라 불렀다. 구글, MIT,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잡고, 라스베이거스 스피어부터 바르셀로나 카사 바트요까지 세계 곳곳에 작품을 걸어왔다. 스스로 인정하듯, 전통적인 의미에서 그림은 잘 그리지 못한다. 대신 "머릿속 눈"으로 기하학적 상상을 한다고 했다.
MoMA 전 관장 글렌 로우리가 옹호에 나섰다. 30년간 뉴욕현대미술관을 이끈 인물이다. 아나돌에게 위촉한 설치 작품 〈Unsupervised〉 — MoMA 소장품 13만 8천여 점의 공개 데이터를 AI에 학습시켜, 작품과 작품이 녹아들며 "존재한 적 없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보통 미술관 관람객이 작품 앞에 머무는 시간은 28초 남짓인데, 이 작품 앞에서는 평균 38분이었다고 한다. 로우리는 200년 전 사진 발명에 빗대었다.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만들어진 이미지 — 그때도 같은 불안이 있었다고.
퓰리처상 수상 비평가 제리 살츠는 달랐다. 그는 〈Unsupervised〉를 "50만 달러짜리 화면보호기", "거대한 라바 램프"라고 잘라 말했다. "아나돌 앞에서는 멍해질 뿐,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다만 전면 부정은 아니었다. "AI는 예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오는 것의 90%는 형편없다. 르네상스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예술가 겸 작가 몰리 크랩애플은 가장 거셌다. "역사상 가장 큰 예술 약탈"이라고 했다. 미술 도난이라면 미술관에서 그림 한두 점이 사라지는 것인데, 이쪽은 수십억 장의 이미지를 한꺼번에 가져갔다고. 제작진이 AI 이미지 생성기에 "시리아 도시 풍경을 몰리 크랩애플 화풍으로"라고 입력하자, 크랩애플이 직접 그린 알레포 그림과 섬뜩할 만큼 닮은 이미지가 몇 초 만에 나왔다. 아무도 허락을 구하지 않았고, 대가도, 이름 석 자도 남기지 않았다.
아나돌은 2020년 이후로 출처가 분명하고 허가를 받은 데이터만 쓴다고 반박했다.
방송이 비켜간 질문
네 사람의 말은 저마다 근거가 있었다. 하지만 방송이 건드리지 않은 질문이 하나 있다. 누가 이 판에 낄 수 있는가.
아나돌이 "허가받은 데이터"만 쓴다고 했다. 그 말 자체는 옳다. 문제는 그 '허가'의 값이다. NASA 아카이브에 손댈 수 있는 채널, MoMA 소장품 데이터를 통째로 학습시킬 수 있는 권한, 구글 서버 위에서 작업할 수 있는 관계 — 이것은 재능이 아니라 접속권의 문제다. 데이터에 대한, 기술에 대한, 기관에 대한 접속권. 합법적인 AI 예술을 하려면, 합법적 데이터에 닿을 수 있는 돈과 연줄이 먼저 필요하다.
동의 없이 긁어 모은 수십억 장의 이미지 위에 세운 AI 예술은, 아무리 눈부시더라도 예술이란 이름으로 치장한 약탈이다. 그렇다면 합법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한 AI 예술은 깨끗한가? 깨끗할 수는 있다. 다만 그 깨끗함에 입장할 수 있는 사람이 손에 꼽힌다는 게 문제다. 저작권을 사고, 기관의 승인을 받고, 대규모 연산 장비를 돌릴 수 있는 극소수. AI 예술은 태생부터 자본 집약적이다.
로우리는 사진의 역사에 빗대었지만, 방향이 정반대다. 사진기는 갈수록 싸졌다. 코닥 브라우니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스마트폰으로. 비디오 카메라도 가벼워졌고, 편집 소프트웨어도 널렸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문이 넓어졌다. 스티글리츠도, 백남준도, 비비안 마이어도 카메라 한 대면 충분했다. 그런데 아나돌 수준의 AI 예술은 반대로 간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진입 문턱이 높아진다. Midjourney 같은 생성기는 누구나 돌릴 수 있지만, 그건 아나돌이 하는 예술이 아니다. 살츠 식으로 말하면 그 90%의 영역이다.
38분의 다른 이름
살츠의 한마디가 남는다. "아나돌 앞에서는 멍해질 뿐이다."
이 말이 찔리는 건, 리터러시의 빈자리를 정확히 짚었기 때문이다. 관람객이 〈Unsupervised〉 앞에서 38분을 보냈다고 한다. 200년치 인류 예술 유산을 하나의 알고리즘이 삼키고, 르누아르를 피카소로, 피카소를 아메바로 녹여내는 광경. 넋이 나갈 만하다. 그런데 그 38분 동안 누가 한 번이라도 물었을까 — 이 영상은 어떤 데이터를 먹었고, 그 데이터는 누가 내주었고, 이 시스템을 돌리는 서버는 누가 대는가. 아무도 묻지 않았다면, 그건 감상이 아니라 굴복이다. 경이가 아니라 마취다.
내가 'AI 리터러시'라고 할 때 말하고 싶은 게 이것이다. AI를 다루는 기술이 아니다. AI가 만들어낸 것 앞에서 질문할 줄 아는 힘이다. 이것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나. 누구의 승낙을 받았나. 누가 돈을 벌고 누가 밀려났나. 그 질문 없이는 관객이 아니라 구경꾼이다. 화려한 표면에 눈이 팔린 채, 뒷면의 구조 — 자본의 흐름, 기관의 독점, 기술의 쏠림 — 는 보지 못한다. 못 보는 게 아니라 볼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짜여 있다.
그래서 누구의 예술인가
60 Minutes의 제목은 "그것이 예술인가?"였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예술인가.
예술이 권력의 손에 놀아난 역사는 길다. 파라오는 전쟁의 교착을 승전으로 새겨 넣었고, 나치는 영화를 체제 선전의 도구로 썼다. 아름다움이 곧 정당성은 아니다. 가장 압도적인 선전물이 가장 잔혹한 체제를 포장했듯, 가장 몰입적인 AI 작품이 가장 기울어진 구조를 감출 수 있다.
AI 예술이 자본·데이터·기관의 독점적 결합 위에서만 꽃피는 것이라면, 그것은 새로운 형식의 군림이다. 테크놀로지의 전환점마다 반복되어 온 풍경이기도 하다 — 힘 있는 쪽이 새 도구를 먼저 쥐고, 그 도구로 만든 것을 '혁신'이라 이름 붙이고, 나머지에게 감탄을 요구하는 풍경.
살츠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맞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탄이 아니라 질문이다. 이 눈부신 것이 무엇을 먹고 자랐는지, 그 양분은 누구한테서 왔는지, 그래서 남은 것은 무엇인지. 질문이 없으면 AI 예술의 미래는 더 많은 사람이 만드는 세상이 아니라, 더 적은 사람이 더 큰 화면으로 더 많은 사람의 눈을 붙드는 세상이 된다.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예술의 탈을 쓴 지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