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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모네비 Nov 18. 2024

01. 글씨체 때문에 메모를 못 한다고?

잘 쓴 것처럼 ‘보이게‘ 하는 꼼수

“이거 다 언니가 손으로 쓴 거야?”


강의실 옆자리에서 친구가 소곤거렸다. 친구가 가리킨 ’ 이거’란 아이패드에 쓴 수업 필기를 말했다. 교수님이 계속 ppt를 넘기고 계셔서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작게 고개만 끄덕이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친구의 말이 질문이 아니라 일종의 감탄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와’하더니 다시 교수님 쪽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여 아이패드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모눈 모양의 바탕에 검정 글씨가 빼곡했다. 실시간으로 교수님 설명을 옮겨 적는 중이지만 정렬과 글씨 크기가 일정했다.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칭찬에 약한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글씨 칭찬은 언제 들어도 좋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가 또 물었다.


“어떻게 글씨를 그렇게 써?”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지금 보니 약간 재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글씨에는 비밀이 있다. 바로 확대해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그건 꽃이고, 이건 멀리서 봐야 그럴듯하다. 가까이서 보면 한 구석이 일그러진 리을(ㄹ), 미음(ㅁ)처럼 보이는 이응(ㅇ)이 눈에 띈다. 그것뿐이랴, 니은(ㄴ)의 가로선은 춤을 추는 마냥 구불거리고 모음 아(ㅏ)의 짝대기는 자꾸 아래로 쳐졌다. 30cm 정도 떨어져서 읽으면 그제야 좀 정갈해 보인다. 찌그러진 자음들은 글씨의 흐름 사이로 슬그머니 숨는다.


일등 공신은 바로 ‘줄’이다. 

나의 노트 필기













꼼수, 줄(line)


줄을 잘 맞추면 필기가 깔끔해 보인다. 각 줄의 시작점을 동일하게 하고 글자 위아래 높낮이를 비슷하게 해 주면 된다. 물론 문자 모양이 일정하면 더 좋다. 그러나 아니라도 괜찮다. 이 글을 쓰면서 혹시 몰라 시험도 해봤다. 여기에는 무려 과학적인 근거까지 있다!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눈으로 들어온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각자의 경험에 따라 보이는 풍경을 뇌에서 ‘해석’한다. 일종의 시각적 착각이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시각이라는 감각에 영향을 미친다. 문자로 모양을 만들어 보면 알 수 있다.


     *

   ***

*******


별 문자를 세 줄로 늘어놓았다. 뭐가 보이세요? 하고 물으면 대부분 삼각형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실제로 삼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 꼭짓점은 서로 이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별 문자가 서로 일정한 간격, 일정한 배열로 모여 있기 때문에 하나의 모양처럼 보인다.


단독으로는 비뚤어져 보이는 글씨가 줄글로 모아보면 번듯해 보이는 이유도 같다. 문자의 높낮이가 같다면, 줄글로 썼을 때 일종의 긴 직사각형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뇌는 ‘어? 직사각형 모양이 쭉 이어지네? 깔끔하다’하고 착각한다.


가끔 인스타그램을 보면 프린터로 출력한 것처럼 손글씨를 잘 쓰시는 분들이 있다. 특히 미꽃체라는 글꼴로 필사하시는 분들이 그렇다. 보다 보면 ‘아니, 이게 글씨야, 인쇄물이야?’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운영하는 독서 챌린지 단톡에도 달인이 계셨다. 누군가 글씨 잘 쓰는 법을 여쭤보자 그분이 비법을 알려 주셨다.


“닮고 싶은 글꼴을 프린트해서 그 위에 따라 쓰는 연습을 해보세요.”


해봤다.

3일 만에 그만뒀다. 재미는 있는데 하나 쓰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앞으로도 꼼수로 필기를 그럴듯하게 위장할 듯싶다. 인쇄물 같은 필기체는 다음에 도전하는 걸로.


줄 맞추는 법



본질은 따로 있다


만약 글씨에 자신이 없는데 줄 맞추는 것도 어렵다면... 그래도 절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메모는 꼭 글씨가 예뻐야만 할 수 있는 걸까?


1:1로 메모 상담을 신청해 주신 분이 딱 그런 고민을 갖고 계셨다. 신청자분의 사연은 이랬다. 책 읽고 메모도 하고, 공부를 위해 노트 정리도 하는데 손글씨로 쓰니 너무 어렵다는 거였다. 본인의 글씨가 마음에 안 들고 손목이 아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게 문제였다. 해결책은 언제나 있다. 우리는 디지털 문명이 발달한 사회에서 산다.


가장 편하게 쓰는 도구가 무엇인지 여쭈어 보았다. 엑셀과 한글이라고 하셨다. 찰칵! 하고 머릿속에서 무엇인가 맞아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면 그걸로 한 번 해봅시다!"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 모양새는 그저 덤일 뿐. 아날로그냐 디지털이냐는 순전히 취향의 문제다. 메모장 고르는 기준은 무조건 편한 게 제일이다. 『메모 습관의 힘』이라는 책에서도 글씨를 신경 쓰지 말라고 조언한다. 기록은 그 자체로 충분히 쓸모가 넘친다.


신청자분은 결국 한글로 템플릿을 만들어 노트필기를 정리하셨다. 손필기보다 시간이 훨씬 절약되고 손목도 안 아프시다며 활짝 웃으셨다. 덩달아 나도 방긋 웃었다. 잇몸이 다 보였겠지만 상관없었다.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기록 방식이 있다는 걸 발견해 낸 순간이었다.


-


단순히 필기를 잘하고 글씨가 예쁜 사람이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메모를 도와주는 사람이고 싶다. 나는 현재 세 개의 기록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 작은 수첩, 디지털 메모 서비스인 노션, 그리고 독서노트.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오가며 생각의 자취를 남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글씨체로 고민하고 있다면, 이제 걱정하지 않길. 자신에게 맞는 기록 방식을 찾아 함께 여정을 떠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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