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를 고르는 법
요즘 하록 선장이라는 캐릭터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록 선장은 은하철도 999로 유명한 작가 마츠모토 레이지의 <캡틴 하록 시리즈>에 등장하는 해적 캐릭터다. 한국에서도 80년대에 <애꾸눈 선장>이라는 타이틀로 방영되었다고 한다. 부모님의 십대 시절이다. 당시 TV 애니메이션을 챙겨 보던 사람이라도 슬슬 기억에서 ‘그런 캐릭터가 있었나?’하고 생각할 법하다. 하지만 98년생인 나는 하록 선장을 알고 있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초등학생 때 은하철도 999 시리즈의 광팬이었다는 점, 두 번째는 담임 선생님의 별명이 하록 선장이었다는 점이다. 선생님은 내게 노트 정리의 비법을 전수해 주신 분이기도 하다.
2000년대 중후반, EBS 채널에서는 명작 특선 애니메이션이 한창 흘러나왔다. <플란더스의 개>, <빨간 머리 앤> 등을 거쳐 편성된 건 <은하철도 999>. 마침 우리 집에는 극장판 시리즈도 있었다. 우주여행과 각종 사건, 약간 어두운 설정은 초등학생에게 자극적이었다. 그 당시 어린이였다면 알 것이다. 흑화, 최면, 납치 같은 소재는 아동이 누릴 수 있는 도파민의 한계선이라는 것을... 나는 당연하다는 듯 빠져들었다. 하록 선장은 극장판에 등장해 주인공을 도와주는 카리스마 캐릭터여서 꽤 호감 있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담임선생님 별명이 하록 선장이었다. 선생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다. 이름이 비슷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고. 같은 반 친구들은 하록 선장이 뭔지도 몰랐겠지만 나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리고 경악했다. 그 하록 선장이라고?
담임 선생님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다. 일단 무서운 타입이셨다. 특히 꾸짖으실 때가 그랬다. 돌이켜보면 그냥 엄한 성격이셨던 것 같은데 당시에는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친구가 사소한 실수로 크게 혼났다. 나는 당돌하게도 학교에 제출하는 일기장에다 선생님의 행동이 왜 부당한지 조목조목 정리해서 냈다. 사춘기를 목전에 둔 초등학교 고학년에게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은 호 아니면 불호였다.
하록 선장은 호, 담임 선생님은 불호. 애니에서 그렇게 멋있게 나오는 캐릭터가 선생님의 별명이라니. 인정할 수 없어! 인지부조화에 빠져버렸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기면 될 것을. 또래 친구들 아무도 모르는 캐릭터를 담임 선생님이 알고 있다는 반가움과 그때까지 쌓인 불호의 감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승자는?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오타쿠 자아의 승리였다.
그렇게 덕심으로 마음을 바꾸고 나니 선생님의 가르침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특히 노트 정리만큼은 톡톡히 덕을 보았다. 가히 스승의 은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은 우리 반 학생 모두 노트 한 권씩을 가져오게 하셨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배운 모든 내용을 그 노트에 적으라고 말씀하셨다. 걷어서 검사까지 하셨으니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선장의 명령이니 크루는 따를 수밖에. 불평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선생님은 엄격하셨다.
<해적 선생님의 노트 세팅법>
1. 노트 한 권을 준비한다.
2. 페이지 가장자리 3cm를 접는다.
3. 자를 대고 접힌 자국을 따라 선을 긋는다.
완성!
노트 준비가 완료되면 페이지 가장자리에 3cm 넓이 칸이 생긴다. 수업 필기를 적을 때 그 칸에 단원명과 간단한 키워드를 적고 넓은 쪽에는 내용을 정리한다. 단순한 규칙이었다. 적당히 문제집만 풀며 공부했던 초등학생에게는 신세계였다. 그 해 시험에서 처음으로 ‘올백’을 맞았다. 노트 덕분인지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 정리법을 잊어버리는 일은 없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페이지 가장자리 3cm를 키워드 칸으로 사용하는 정리법에 정식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로 ‘코넬식 노트 정리법’이었다. 코넬 대학교 교육학 교수가 개발한 필기법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페이지 왼쪽에 세로로 줄이 그어져 있는 노트를 흔히 보았을 것이다. 그게 바로 코넬식 노트의 일종이다.
초등학생 때 배운 건 정식 정리법의 아주 간단한 변형이었다. 정식 방법은 아래쪽에 요약 칸이 추가된다. 주요 내용을 필기 영역에 적고 작은 칸에 키워드, 질문 등을 적은 다음 요약 칸에 5줄 이내로 내용을 요약해 주면 코넬 노트 완성이다.
이 방식은 활용도가 높다. 시험공부 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독서노트 양식으로도 훌륭하다. 내용 부분을 가리고 키워드만 보면서 복습하면 암기 도구가 된다. 독서 노트로 쓴다면 요약 칸을 생각 적는 구역으로 바꿀 수도 있다. 코넬식 노트 제품은 흔하게 구할 수 있어서 필기 초보에게 추천한다.
제대로 코넬 노트를 사용하려면 5R을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5R은 R로 시작하는 다섯 단어의 약자다. 기록하기, 요약하기, 암송하기, 깊이 생각하기, 복습하기(Record, Reduce, Recite, Reflect, Review)이다. 개인적으로 굳이 거창하게 5R이라는 명칭까지는 필요 없는 것 같다. 요점은 요약하고 외우면서 복습하라는 거 아닌가.
세상에는 코넬식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필기장이 있다. 어떤 노트를 선택해야 할까? 고르는 법은 어렵고도 간단하다. 자신의 목적에 맞게 고르면 된다. 시험공부용 노트는 비교적 고르기 쉬운 편이다. 시중에 과목별로 노트를 판매하고 있으니 말이다. 수학 노트, 한자 노트, 심지어 고시 공부용 노트패드까지 종류별로 다 있다. 평소 취미나 자기 계발을 위해 사용할 기록장을 고르는 게 정말 애매하다.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성취가 목적인지는 자기 자신만 안다. 남이 좋다고 추천한 제품이 잘 안 맞을 수도 있다.
질문은 항상 포괄적으로 들어온다.
“노트 뭐가 제일 좋아요?” “독서 노트 추천 좀 해주세요.”
그러면 나는 기록 생활에서 무엇이 가장 어려운지를 여쭤본다. 사람마다 자기에게 맞는 방식이 따로 있다. 함부로 추천했다가 욕을 먹느니, 한 분씩 구체적인 사연을 듣고 딱 맞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는 게 낫다. 운영하는 챌린지에서는 아예 목적별로 추천하는 도구를 정리해서 제공한다.
해적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에 이후 필기는 내 특기가 되었다. 계속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학년이 바뀌고 습관이 없어졌을 텐데, 애니메이션을 향한 호감이 겹쳐 좋은 인상이 남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필기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선생님의 가르침과 나만의 다양한 시도가 좋은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다.
글을 읽는 독자들도 어떤 노트가 좋은지 고민하기보다는, 우선 마음에 드는 걸 골라 기록을 시작해 보길 바란다. 초등학생의 내가 코넬 노트법 외에도 여러 방법을 익히며 나에게 맞는 기록법을 찾아낸 것처럼, 하다 보면 자신만의 노하우가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