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랜만에 여유로운 토요일이었다. 일기장을 챙겨 들고 동네 카페로 갔다. 몇 주째 빈 페이지로 처박혀있던 일기장을 다시 깨우고 싶었다. 이가 빠진 채로 내버려 뒀던 지난 겨울의 빈칸들도 채워버릴 작정이었다.
지난날에 대한 기억은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사라진다. 뭐라도 붙잡아 쓰려면 몇 가지 도구가 필요하다. 상습적으로 일기를 미루는 나에게는 다 나름의 알고리즘이 있다.
우선 달력 어플을 확인한다. 몇 시에 누구를 만났는지, 뭘 했는지가 적혀있다. 그 기록을 지름길 삼아 빠르게 그날에 닿는다. 잊고 있던 생각들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달력에 아무것도 안 적혀있는 날이라면? 다 방법이 있다. 가계부 어플과 배달 어플을 켠다. 그날 뭘 샀는지, 뭘 먹었는지가 거기 나온다. 좋은 힌트가 된다. 하지만 돈도 한 푼 안 쓴 날이라면? 조금 귀찮지만 메신저 어플 속 친구들과의 대화를 살펴본다. 보통은, 해가 중천에 뜬 다음에서야 일어났다든가,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든가 하는 말을 하는 내가 있다.
그 모든 그물에도 안 걸리는 날이 간혹 있다. 아무런 약속도 없고, 돈도 안 썼고, 친구들에게 딱히 별 말도 안 한 날. 얼른 일기장의 빈칸을 채워버리고 싶어 안달이 난 나는, 던지는 것마다 쏙쏙 피해 가는 과거의 내가 얄밉다. 대체 그날 하루 종일 뭘 한 거야!
그렇게 머리를 싸매다가, 나의 하루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나, 하는 생각에 이른다. 관계와 의무와 소비를 빼고 나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시간은 분명 그 밖의 무언가로도 채워졌다.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을 빼고 남는 게 정말 '진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손 틈 사이로 가장 먼저 빠져나가는 그 진짜를 잡으려면 매일 밀리지 않고 일기를 잘 써야 한다는, 모범생 같은 결론에 도달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