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이 좋다. 당연한가? 정확히는 퇴근길이 좋다. 회사를 나와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산 넘고 물 건너 집으로 오는 매일의 시간이 좋다.
오가는 평판, 끝없이 평행선을 달리는 이해관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의 무력감, 오늘 내가 한 멋지지 않은 말, 내일 일에 대한 걱정 같은 건 퇴근길 차창 밖을 스치는 불빛들 속에 하나씩 천천히 내려놓는다. 가끔 버스에서 까무룩 졸다 깨면 하루종일 그저 한바탕 꿈을 꾸다 온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하루치 불순물들을 조금씩 내려놓고 버스에서 내리면 다시 조용한 우리 동네다. 회사에서 집까지는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남짓.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웬만하면 이제는 회사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동네로 이사를 고려해 볼 법도 한데, 그럴 생각은 없다. 회사와 물리적으로 멀어지고,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공간으로 이동한다는 것이 주는 홀가분함이 있다.
퇴근길 버스에서 내리면 끝없이 이어진 여의도의 빌딩숲과는 톤 앤 매너가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일상이 마중나와 반겨준다. 나무가 많은 동네, 늦은 시간에도 밤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제야 치렁치렁 무거운 것들을 하나 둘 다 내려놓고, 나도 모르게 굳어있던 어깨에 힘을 풀고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온 기분이 든다.
버스에서 내려 동네 빵집에서 좋아하는 빵을 사들고 집으로 온다. 물을 끓이고 차를 우린다. 하루의 2막이 시작된다. 앞 장의 원망과 불신, 비관 같은 질 나쁜 감정은 여의도에서 끝이 났고, 이곳에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