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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May 06. 2024

글감이 없는 계절

글감이 없는 계절이다. 잘 해내고 싶은 업무를 맡아 요샌 정말 자나 깨나 일 생각뿐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일상은 완전히 압도당했다. 올여름 이사를 앞두고 있어 이제는 슬슬 알아보고 준비해야 할 때가 왔는데, 그 모든 걸 하루하루 미루고 있다. 이번 회의만 끝나면, 이번 촬영만 끝나면, 하고 있다. 취미 생활도 뒷전이다. 마음 편히 친구들을 만난 지도 오래됐다. 냉장고는 텅텅 비었고 집은 엉망이다. 절대적으로 내 시간이 없는 건 아닌데, 뭘 하든 늘 마음은 다른 데로 가있다. 솔직히 그게 싫거나 힘들진 않다. 아니, 오히려 활기가 넘치고 재밌다. 만사 제치고 몰입할 거리가 있다는 것이 주는 희열이 있다. 걱정은 많지만. 어쨌거나 좋은 기회를 얻었으니 많이 배우고 싶다. 


그럼에도 바보가 되기 싫다는 생각은 한다. 일 말고는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할 필요를 못 느끼는, 그리고 때론 본인의 그런 점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업계의 사람들을 많이 봤다. 난 그런 거 몰라,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해? 당연하게 남들에게 해달라고 하는 사람들. 내가 그렇게까지 될 거라고는... 차마 생각 안 하지만, 해줄 사람도 없지만, 솥뚜껑이든 자라든 아무튼 조금이라도 비슷하게 될 순 없다.


매 작품마다 업무 체크 리스트를 만들곤 한다. 일을 하며 놓치는 게 없었으면 한다. 하루에 많으면 수십 개의 일들이 쓰이고 또 지워진다. 그렇게 해서 혹시 빠진 일은 없는지, 잊어버린 건 없는지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그 밑에 체크 리스트를 하나 더 만들었다. 이건 이름하여 생활인 체크리스트. 방치되어 있는 일상을 돌보고 가꾸기 위한 항목들이 꾸준히 쓰이고 지워질 예정이다. 이미 몇 가지가 지워지길 기다리며 적혔다. 아마도 당분간은 일 쪽에 더 무게를 두겠지만, 그럼에도 적당한 균형점을 찾기 위해 노력은 계속된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그 일상의 어느 지점에서 글로 쓰고 싶은 것들도 생겨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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