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문을 여는 순간

by 영빈

문이 열리자, 익숙한 공간이 나를 맞았다. 안쪽은 생각보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햇빛이 반쯤 가려진 커튼 사이로 들어와 탁자 위에 놓인 펜을 희미하게 비췄다. 방 안에는 커피 향이 옅게 배어 있었고, 그 향이 내 숨과 뒤섞이며 마음 한구석을 간질였다. “누구니?”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상상했던 새로운 상담 선생님은 조금 더 차갑고 무던한 사람이었는데, 눈앞의 선생님은 그런 이미지와 달랐다. 말투는 조용했지만 단단했고 시선은 내 눈을 피하지도, 깊게 파고들지도 않았다. 그저 ‘네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눈빛이었고 내가 스스로 말해주기를 기다려주는 ‘기다림’에 가까웠다.


“이쪽으로 오렴.” 선생님은 의자 쪽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아주 살짝 끄덕이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의자에 앉자마자 내 몸이 얼마나 굳어 있었는지 비로소 느껴졌다. 손끝은 얼어붙은 듯 차가웠고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편하게 있어도 돼.” 그 말은 어딘가 낯설었다. 나는 평생 ‘편하게 해도 된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진짜로 편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 말은 때로 ‘지금은 긴장해도 된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날의 목소리는 달랐다. 어쩌면 말보다 그 말 사이의 침묵이 나를 진정시켰던 것 같다.


선생님은 내 앞에 무언가를 가져오시더니 내게 왜 왔는지를 묻기보다 상담실의 규칙을 먼저 설명해주셨다.
지겹게 들었던 상담실의 규칙이었다. ‘자해나 타해의 위험이 있거나, 자살 위험이 있을 경우 부모님께 연락이 간다.’ 그런 뻔한 이야기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설명이 끝나자 긴장이 한층 풀렸다.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상담카드를 작성한 뒤, 선생님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왔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그 한마디가 공기처럼 가볍게 흘렀다. 나는 대답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그 어떤 문장도 내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눈빛은 ‘대답하라’가 아니라 ‘괜찮아, 지금 이대로 있어도 돼’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을 바닥에 둔 채,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숨을 골랐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이젠 말을 해야겠다 싶어 조금씩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하는 내내, 선생님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중간중간 무언가를 종이에 적으셨을 뿐이었다. 상담 시간은 언제나 내게 어딘가 불편한 시간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달랐다. 누군가 내 곁에 조용히 있어준다는 것, 그것만으로 마음속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닫혀 있던 문이 조금씩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그제야 시간이 꽤 흘렀다는 걸 알았다. 내가 상담 이외에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편하게 말해본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은 그게 전부였다. 모든 말을 다 하진 않았지만 방을 나서면서 이상하게 조금은 덜 무너진 기분이 들었다. 무거운 돌이 아주 살짝 누군가의 손에 의해 옮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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