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양키캔들이었어

이달의 소비 : 논픽션 캔들

by 메모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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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키캔들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센스있는 선물에 양키캔들이 빠지지 않았고, 초 뿐만 아니라 방향제나 향 카드로도 사람들은 이곳 저곳에 향을 널었다.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며 라지 자(Large jar) 사이즈의 캔들을 샀고, 차의 백미러에 방향제를 달았다. 내가 선택한 향은 클린코튼이었다. '화이트 플라워와 레몬 블렌딩으로 햇볕에 잘 말린 순면의 맑고 깨끗한 향'으로 설명되어 있는 냄새. 캔들을 태울수록 방은 한층 포근하게 느껴졌고, 방향제는 차에서 느끼던 삭막함을 가시게 했다. 방에 있는 물건들은 이미 눈에 익어버려서 들일 때의 마음이 사그라든 지 오래였지만, 실체가 없는 향은 마주할 때마다 새롭게 느껴졌다. 권태롭게 느껴지던 방에 들어차는 산뜻함. 매일 머물던 곳이 이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면서 새삼스레 애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클린코튼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느낌이었다. 깨끗한 향이 주는 단정함이 좋았지만 뒤따르는 단조로움이 아쉽게 느껴질 때쯤, 나는 방을 채울 새로운 향을 찾았다. 클린코튼 다음으로 선택한 향은 볼루스파의 크레인 플라워. '꿀에 절인 자몽 청에 시원 상쾌한 제라늄 몇 송이를 더 한 듯 화려한 향'이라는 설명답게 향은 풍성함을 품고 방에 번지며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포근했던 방에 생기가 돌았고, 향이 바뀌면서 방에 머무는 내 마음의 자세도 바뀌었다. 줄곧 누워있다가 일어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향을 바꿀 때마다 느끼는 소소한 변화에 공간을 누리는 재미가 쏠쏠해졌다. 나는 공간을 맛보는 새로운 방식에 눈을 떴다.

그동안은 공간을 시각적으로 인식했다. 전체적인 레이아웃과 가구의 배치, 조명의 조도와 색의 조합을 눈여겨 보았고, 소품의 디자인을 훑으며 공간의 결을 느꼈다.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이 편안해질 때, 공간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그에 어울리는 노래 정도가 더해 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에 향을 채우기 시작하면서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중심에는 향기가 있음을 깨달았다. 클린코튼에서 크레인 플라워로 향을 바꾸면서 내 마음의 자세가 바뀐 것처럼, 모든 것을 바꾸지 않아도 전부를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향이었다. 공간의 분위기를 극대화하고 공간의 쓰임을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가구의 배치나 조명의 개수가 아니라 향이겠다고, 그래서 향이라는 건 공간을 채우는 구성요소를 넘어서 완전한 공간을 경험하게 하는 마침표 같은 역할이겠다고 생각했다. 공간을 인식하는 가장 섬세한 감각은 시각이 아니라 후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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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는 논픽션의 캔들을 샀다. 향은 테이블 게스트. '초여름이 시작되는 달콤한 공기, 보랏빛으로 익어가는 블랙커런트와 여린 풀잎의 상쾌함'의 향이 이번에는 나를 어떤 공간에 데려다 놓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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