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시작

이달의 소비 : 플레이스테이션5

by 메모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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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돈뿐만 아니라 다양한 물건을 소비하면서 자라난다. 그 소비의 흔적들은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 때로는 과거의 추억을 현재로 되살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있어 '남자들의 공기청정기' 플레이스테이션5는 추억의 가교나 다름없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날, 부모님과 함께 당시 '용산 던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악명 높았던 용산 지하 전자상가에 플스1을 사러 갔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아니, 일상에 치여 조금은 희미해졌던 그날의 기억들이 최근 플스의 30주년 기념 부팅 화면을 보면서 리마스터링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화면에 비친 과거의 상징들은 어린 시절 그 누구보다 가까웠지만 서서히 연락이 끊긴 친구를 길에서 우연히 재회한 듯한 따뜻함과 신비로움을 안겨주었다.

아직은 유복했던 시절의 어린이날, 그날 아침의 공기는 꽤나 서먹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몰래 오락실을 드나들다 걸려 혼난 뒤였기 때문이다. 선물은 바라지도 않았는데 부모님께서 외출을 하자신다. 그래도 명색이 어린이날이니 외식 정도나 하는 줄 알고 부모님을 따라 집을 나섰다. 하지만 이게 웬걸, 도착한 곳은 용산 지하 전자상가. 내 눈앞엔 수많은 게임기와 그 뒤로 어린 양 같은 손님들을 기다리는 하이에나처럼 무서운 형들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의 내 나이쯤 된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함께 용산 지하 전자상가를 걸으며 느낀 적개심이 더해진 설렘은 아직도 생생하다. 여러 곳을 둘러보다 마침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선택을 받은 가게에서 플스가 내 손으로 건네졌을 때의 경이로움은 잊을 수 없다. 정식 발매가 되지 않은 탓에 가격도 상당했던지라 그때의 플스는 일종의 사치품이었다. 나는 남들보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컨트롤러, 아니 그땐 '조종기'라 불리던 것을 손에 넣게 되었다. 집에 와 부랴부랴 티비에 연결했다. 처음으로 나타난 부팅 화면, 처음으로 손에 닿은 플스 패드의 감촉, 처음으로 본 오락실의 아케이드 게임과는 또 다른 화려한 그래픽은 나를 한순간에 새로운 세계로 데려갔다. 지금이야 한글화되지 않은 소프트를 찾는 것이 일이지만, 그 당시엔 한글화고 뭐고 우리나라에서 콘솔 게임 자체가 귀했다. 지금도 발매되는 시리즈마다 플레이하는 '슈퍼로봇대전'을 이때 처음 시작하였다. 어렸을 땐 한글화 공략집과 대사집을 일일이 맞춰보며 열심히도 했었다. 높은 난이도, 복잡한 기믹과 전투들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로봇들이 성장하는 순간들을 목도하는 것은 정말 흥분 그 자체였다. 그때의 짜릿함을 잊을 수 없어 오랜 시간 슈로대의 팬이 되었고, 20여년이 지나도록 의리로 플레이하는 게임이 되었다. 아무튼 플스는 나에게 단순한 게임 머신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장이었으며, 그 세계에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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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면서, 플레이스테이션도 변화를 거듭했다. 모든 것에는 흥망성쇠가 있듯이, 플스 역시 모든 시리즈가 잘 나갔던 건 아니다. 우리 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 유복한 유년기를 보낸 이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질 정도로 어려운 시기도 겪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이번엔 (와이프가 허락해 줘서) 내가 내 돈으로 플레이스테이션5를 사게 되었다. 그것을 마주하고 있으면 가끔 만감이 교차한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나도 그 시절의 부모님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부모님이 보여주셨던 행동들을 좀 더 들여다보게 된다.

당시 플스를 받아 들면서 부모님과 했던 약속이 하나 있었다. '다시는 몰래 오락실 가지 않기'. 오락실의 출입을 금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몰래 가지 말라는 말이었다. 잘 생각해 보면 게임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때는 나쁜 형들이 모이는 장소가 오락실이었고, 게임은 대부분 애들 장난 혹은 해로운 것으로만 취급받던 때였다. 하지만 게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게임을 하는 환경이 문제라고 생각했던 부모님을 운 좋게 만난 덕분에 나는 윤택한 게임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게임을 단순한 시간 낭비가 아닌, 내가 즐길 수 있는 하나의 취미로 존중해 주셨다. 그리고 그것들을 함께하진 못해도 적정선에서 나의 관심사를 지지해 주셨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런 경험들은 생활 속에 스며들어 켜켜이 쌓여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태도의 기반이 되었다. 그렇게 좋은 울타리 안에서 게임기를 받아 들고 몇 날 며칠동안 잠을 설치던 아이는 제법 사고를 할 줄 아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까 플스6도 발매되면 사야 해,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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