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너무 무거운 접이식 의자

'피크닉'을 즐기기 위한 소비

by 메모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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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나는 그것에 쓰일 물건을 먼저 고르게 된다. 이걸 하려면 역시 이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이미 그 일을 시작한 사람처럼 주변을 둘러본다. 만년필 하나, 공책 한 권, 혹은 새 운동화 한 켤레나 옷 같은 것들. 익숙하지 않은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그 세계의 도구를 만져봐야 한다는 본능 같은 욕망이 있다. 낯선 세계의 문턱에서 내 품에 들어온 물건이 손끝에 닿을 때 감촉은 이상하리만치 든든하다. 꼭 필요한 물건을 손에 들어야 안심이 된다. 이젠 정말 '시작' 할 수 있다는 확신이 그렇게 찾아온다.

나는 지금껏 그 본능에 이끌려 다양한 도구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전공 수업으로 사진을 배워야 했을 때는 카메라 매대와 인터넷 창을 오가며 수십 개의 모델을 들었다 놨다 했다. 취미로 자전거를 타려고 했을 때는 그램(g) 단위, 미리(mm) 단위로 제원을 비교하고 수많은 자전거의 안장 위에 올라갔었다. 그렇게 볼링도, 러닝도 시작할 때 무엇 하나 쉽사리 시작해 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있어 용품을 손에 쥐는 것은 그 세계의 규칙을 들여다보는 것이었고, 비로소 그 세계와 조우하는 의식 같았다. 그것들은 저마다 내게 다가올 가능성을 알려주었다.

이런 가능성을 느끼는 감각이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면서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즐거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만년필을 새로 쥐어 볼 때, 새 노트에 손을 얹을 때, 도구들이 나의 일부가 되어 있을 미래의 나를 조용히 상상해본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물건에 닿는 감촉만으로도 조금 더 그때에 가까워진다. 낯설어도 한 발 한 발 나아가겠다는 약속을 스스로와 해본다. 용품은 다짐을 증명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다짐이 꼭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준비는 했지만, 어쩌다 시간이 흘러 그대로 남는 물건들도 있다. 예쁘게 포장된 만년필과 다이어리는 여전히 새것 그대로 서랍 속에 있고, 가끔 한 번씩 잡아봤던 푸시업 바는 창고 구석에 덩그러니 있다. 피크닉을 가겠다고 사놓았던 접이식 의자도 마찬가지다. 푸른 잔디밭에 펼쳐놓고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을 계획이었지만, 그 의자는 아직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채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미뤄졌던 나들이는 끝내 오지 않았고, 먼지 탄 의자는 조용히 나의 미완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 녀석들은 미뤄둔 약속처럼 남아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쩌면, 언젠가 다시 펼쳐질 가능성을 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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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했으나 사용되지 않은 것들도 삶의 일부가 된다. 삶의 곳곳에 쌓인 그런 물건들이 모여 하나의 풍경을 만든다. 그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마음이 앞선다. 사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이런 시간들이 아닐까. 과거의 실패, 좌절을 통해 나를 알아가고 관대해지기도 하며, 때로는 다시 나아갈 방향을 찾는다. 우리는 시작의 무게를 받아들이고, 차곡차곡 채워나간다. 그 때의 다짐은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늘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그렇게 나는 지금 먼지를 털어낸 의자를 잔디밭 대신 거실에 펼쳐 놓고 앉아 LP 플레이어를 세팅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게 나를 1950년대 재즈가 흘러나오는 어느 바(bar)로 데려다줄지, 아니면 또 하나의 먼지 쌓인 다짐으로 남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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