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향기

이달의 소비 : 산타마리아 노벨라 멜로그라노

by 메모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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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1층을 지날 때면 공기 속에 머문 수십 개의 향이 가볍게 뒤섞이다가 다시 제자리로 가라앉는다. 어떤 향기는 기억으로 남아, 잊고 있던 순간들을 문득 떠오르게 만든다. 콧속으로 스며든 그 장면은 오래된 필름처럼 흐리지만 강렬하게 스쳐 지나간다. 어딘가에 박혀 있던 낡은 사진을 발견한 것처럼 향기는 갑자기 시간을 거슬러 어딘가로 데려가기도 한다.

향에 예민한 나는 향수를 쓰지 않는다. 화장품이나 향수를 파는 곳에선 각종 향이 공중에서 충돌하며 내 머리를 울린다. 그럼에도 약 10년 전, 나는 그곳에 서 있었다. 성년의 날, 여자친구에게 줄 향수를 고르기 위해. 친구의 추천을 받아 선택한 랑방 향수는 내겐 그저 병 속의 액체였지만, 그녀에게 건넸을 때의 표정은 지금도 선명하다. 붉은 장미 다발과 함께 건넨 향수 병을 받아든 그녀의 환한 얼굴이 마음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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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별다른 기념일도 아닌데 향수를 샀다. 그녀가 언젠가 말했던 산타마리아 노벨라의 멜로그라노. 랑방에서 산타마니라 노벨라로 바뀐 향수처럼 우리의 12년도 변화했다. 대학 근처 쇼핑몰에서 백화점으로, 어색한 데이트에서 편안한 일상으로, 각자의 집에서 우리의 집으로. 하지만 향수를 고르며 느꼈던 그 몽글몽글한 감정은 여전히 같다. 시간이 흘러 아내가 된 그녀가 눈여겨본 향수를 사 들고 집으로 향하는 길, 백화점을 빠져나오자 두통은 사라졌다. 대신 가슴 한편에 살며시 피어오르는 설렘이 자리했다. 12년 전과 같은 설렘. 향수를 건네며 마주할 그녀의 미소를 기대하며 길을 나섰다.

소비의 목적이 단순히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라면, 나는 향수가 아닌 그녀의 미소를 사는 셈이다.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소비하는 것은 물건이 아닌,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향수병 속에 담긴 것은 단순한 향이 아닌, 12년의 시간과 기억,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우리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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