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사람의 손목

이달의 소비 : 세이코 시계

by 메모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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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만에 복직을 한다. 육아휴직이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크게는 삶의 지표가 바뀌었고, 아주 자잘하고 사소한 것에서 얻는 가치 값도 달라졌다. 삶의 중심은 나에서 가족으로 옮겨갔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타협이라는 것을 모르고 뻗어있던 꼿꼿한 나뭇가지에서 바람에 따라 유연하게 흐르는 갈대로 모양을 바꿨다. 나를 위한 쇼핑이 예전처럼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고, 기분 전환을 위해 네일샵에 가는 일은 약간의 사치가 되었으며, 매일 바꿔 끼던 실버 반지들은 손길이 닿지 않아 변색된 채로 굴러다녔다. 내 시간으로는 길었고, 아이의 시간으로는 짧았던 2년이라는 세월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남편은 나의 복직을 기념하며 데이트를 제안했다. 내가 다시 출근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뿐만이 아니라 남편에게도 여러 의미로 기념할 만한 일이었다. 우리는 조도가 적당히 낮은 카페에서 커피를, 목소리를 약간 높여야 하는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복직을 조촐하게 축하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편은 선물을 하나 고르라고 했다. 이왕이면 재출근 기념일을 기억할 만한 물건이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이면서.

뜻밖의 숙제에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이왕이면 기념일의 취지에 걸맞은 물건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사회 초년생도 아니고 9년간 일하던 곳으로 돌아가면서 출근을 위해 딱히 필요한 물건이랄게 없었다. 쓰면 사라지는 소모품을 사고 싶지 않았고, 매년 비우는 옷장에 옷을 채우는 일도 내키지 않았다. 별생각 없이 화장대를 정리하던 날, 서랍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손목시계를 발견했다. 내 손목 사이즈 대로 묵직하게 주름이 배어있는, 출근하던 나와 매일 함께했던 시계였다. 언제 멈췄는지 알 수 없는 시곗바늘은 두 시 오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0대 중반, 첫 출근을 하고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산 시계였다. 직장인이 되면서 전보다 시간을 확인할 일이 잦아졌고, 매번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하는 일이 번거롭다고 느낄 때쯤이었다. 시계라는 것의 원래 목적이 시간을 확인하는 데에 있지만, 손목시계란 그저 패션 악세서리 정도로 여겼던 나에게 본래의 목적대로 쓰일 시계를 찾는 것은 여러 조건이 뒤따라 붙은 제법 까다로운 일이었다. 인덱스가 선명해야 했고, 다이얼의 사이즈가 보통의 여자 시계보다는 커야 했다. 어디에나 어울리는, 무난하지만 아주 평범하지 않은 디자인이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시계를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뒤로 조건에 부합하는 시계를 찾기 위해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썼다. 그리고 마침내 내 손에 들어온, 마크제이콥스 시계. 까만색 가죽 줄과 금색 베젤이 적당히 단정한 멋을 내는, 선명한 인덱스와 한눈에 들어오는 정사각형의 다이얼이 시원하게 빠진 시계였다. 공들여 찾은 시계를 차고 출근한 날, 손목을 돌려 간결하게 시간을 확인할 때마다 이제야 진정한 직장인이 되었다는 우스운 생각을 했었다. 매일 손목시계가 필요한 것이야말로, '일을 한다'는 상징 같은 것이라고. 나는 매일 아침 시계를 차며, 내가 '일하는 사람'임을 되새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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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대신 손목 보호대를 찼던 시간을 떠올리면서, 두시 오십분에 머물러있는 시계를 다시 손목에 찼다. 재출근을 기념할 만한 선물로는 시계가 적당하겠다 싶었다. 손에 걸치는 모든 것이 짐이 되던 시간을 지나, 다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는 새 시계를 차기로 했다.

올해로 10년, 약간 큰 정사각형의 다이얼에서 느껴지는 발랄함이 어쩐지 머쓱해지는 연차. 이번에는 다이얼의 사이즈가 두드러지지 않는 차분한 디자인을 골라본다. 손목 사이즈대로 접혀있는 가죽 줄을 뒤로하고 고전적인 맛이 있는 메탈 시계를 살핀다. 단정함보다 담백함이 어울리는 나이임을 실감하며 고른, 직사각형의 다이얼에 터키블루의 핸즈와 용두가 조화로운 세이코의 메탈 시계. 나는 다시, 일하는 사람이 되어 집을 나선다. 왼쪽에 새 손목시계를 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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