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로 소비하는 기분
중요한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해 달력에 빨갛게 표시를 해둔다. 생일, 결혼, 출산, 승진, 집들이 등 각자의 삶의 특별한 순간들이 모여 축하할 일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축하의 순간들은 마치 긴 밤을 비추는 불빛처럼 우리 삶을 밝히지만, 그 불빛을 켜기 위해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 장작이 필요한가. 매번 불을 지피기 위해 우리는 지갑을 열고, 포장지를 뜯고, 또 다른 의무를 짊어진다.
거기에 뭔가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챙길 날들은 많다. 발렌타인데이를 필두로 화이트데이, 블랙데이, 로즈데이... 끝없이 이어지는 '~데이'는 우리 삶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게 사랑은 초콜릿과 사탕이 되고, 감사는 지갑이 되고, 존경은 넥타이로 포장되어 계산대 위에 올려진다. 마치 선물이 없다면 그 날의 의미도 없는 것처럼.
달력을 넘기는 소리가 한 장, 또 한 장 살랑거릴 때마다 새로운 기념일의 압박감이 찾아온다. 이렇게 한 해 동안 부지런히 빨간 동그라미를 챙기다보면 어느새 추워진 거리가 온통 붉은색과 녹색으로 물든다. 골목부터 백화점까지 형형색색 조명들은 눈을 현혹한다. 끝없이 울려 퍼지는 캐럴은 이제 더 이상 아기 예수의 탄생을 노래하지 않는다. 종교적 의미는 희미해지고, 어떤 선물을 준비할지 의무감만이 남았다. 전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것은 경건함이 아닌, 소비의 유혹이다. 이 날은 이제 '연말 대목'이라고 불리고 있다. 쇼핑백을 든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종소리를 뒤덮는는다.
공통의 기념일이 다가올 때마다 거리의 화려한 간판들이 외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지 않을 건가요?' 그 소리에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전해줄 무언가가 없는 사랑은 불완전한 것처럼, 소비 없는 기념일은 의미가 없는 것처럼. 정해진 간격으로 찾아오는 이 상업적 기념일들은 우리의 감정을 상품화하고, 관계의 깊이에 숫자를 붙인다. 언제가부터 선물 교환의 장으로 변질되면서 우리의 마음은 점점 더 비싼 가격표를 달아야 인정받고 있다.
잠깐.
우리는 언제부터 기념일을 '소비의 날'로 둔갑시켰을까? 의미를 기억하기보다 물건을 구매하는 날로, 마음을 나누기보다 선물을 교환하는 날로. 특별한 날, 특별한 선물을 하라는 광고마저 당연시되었다. 어디서부터 놓치고 있던 것일까. 이제는 상업화된 기념일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소비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사실 어렴풋이, 아니 잘 알고 있다. 1년에 한 번 비싼 선물을 교환하는 것보다, 매일 나누는 소소한 대화와 눈빛으로 쌓인 우리만의 기억이 더 특별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어쩌면 진정한 기념일은 달력에 표시되지 않은 날들일지도 모른다. 우연히 마주한 미소, 평범한 저녁 식탁에서 나눈 대화, 시답잖은 주제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던 주말. 그런 날들에 우리는 무엇을 소비했던가. 그 안엔 돈이 아닌 시간이, 물건이 아닌 감정이 있었다.
나는 이제 다른 달력을 만들고 싶다. 소비의 날이 아닌, 기억의 날들로 채워진 달력. 그 달력에는 가격표가 없다. 대신 우리가 함께한 순간들의 흔적이 담겨있다. 함께 만든 추억을 영수증이 아닌 마음 속에 기록하고 싶다. 소비의 흔적이 아닌, 마음의 흔적으로.
달력 위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질 때마다 나의 지갑은 얇아진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동그라미를 지폐로 채우지 않아도 마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는 날이 되길 바란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념일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