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촉해진 달력

'기념일'로 소비하는 관계

by 메모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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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부턴가 5월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린이날로 시작해 어버이날과 스승의날, 성년의날을 거쳐 부부의 날로 마무리하는 가정의 달이 약간 피곤하게 느껴졌달까. 생각해보면 5월을 즐기던 때도 있었다.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고민하고, 잊고 지냈던 선생님께 오랜만에 연락을 드리는 일을 기꺼이 즐겁게 했던 때가.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넉넉한 마음이 있었고 뒤따르는 뿌듯함에 흡족했었다. 봄의 절정에 다다른, 따뜻하고 부드럽다 못해 화사하기까지 한 계절에 사람들과 함께 보낼 날이 정해져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한 조합이라고, 5월은 그런 달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음의 여유라는 것은 해를 거듭할수록 자리를 좁혀갔고, 고민이라는 것을 '선물'에까지 나눠주기에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살아보니 실용적인 것이 제일이라며 선물은 돈으로 퉁쳤고, 상대도 나만큼 바쁠 것이라는 합리화로 연락을 미뤘다. 그렇게 나는 5월과 멀어져갔다.

삶이라는 건 갈수록 건조해졌다. 기념일이 다가옴을 느끼는 순간부터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기념일을 기념일답게 보내던 때의 마음가짐이 사라졌달까. 상대방을 향해있던 마음은 방향을 틀어 나로 향했다. 상대를 생각하며 설렘을 느끼는 날에서, 내 마음 편하자고 '도리'를 챙기는 날로 변해버렸다. 상대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 적당히 챙기며 살아야 하는 의무처럼 느껴지는 일. 명분만 남은 일에 재미가 따라올 리 없었다. '관계 유지'란 얼마나 보수적이고 따분한 일인가에 대해 생각하면서, 과하지 않지만 모자라지 않게 적당히 챙기며 살자는 식으로 마음을 먹곤 했다. 적당하고 근근이 챙겨나가야 하는 날, 기념일은 짐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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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친구의 부부와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날, 갑자기 아이스크림 케이크 배달이 왔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배달에 당황하고 있을 때 걸려온 전화. 남편의 또 다른 친구였다. 부부의 날이라 케이크를 보내 봤다고, 즐거운 시간 보내라는 미혼인 친구의 전화였다. 케이크를 자르고, 웃고, 떠들며 그날의 분위기는 무르익어갔다. 유난히 달게 느껴졌던 케이크를 먹으면서 나는 '이게 부부의 날인가?' 싶었다. 그날 아침, '부부의 날이 별건가' 애써 외면하며 출근했던 나를 떠올리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친구가 케이크를 보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예전의 내가 상대를 생각하며 선물을 고르던 마음과 맞닿아 있겠지 싶었다. 나로 인해 상대가 기뻤던 순간, 그래서 나 역시 기뻤던 그 순간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상대를 위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내가 더 기뻤던 일. 기념일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부터, 기념일을 기념일답게 보내는 시간 모두에는 '그래서 행복한 내'가 늘 기저에 깔려있었다. 기념일을 챙기는 행위를 '관계 유지'라는 딱딱한 말로 덮어버렸지만, 그 뒤에는 팍팍하게 살다가 바스라지기 직전까지 가버린 메마른 내가 숨어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하루, 그 속에서 우리는 가끔씩 일어나는 소소한 행복을 먹으며 산다. 그 작은 행복에 기념일이라는 보너스가 숨어있었음을,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사이가 돈독해지는 일은 내 삶의 밀도를 채우는 일이라는 사실도. 그래서 기념일을 챙긴다는 것은 숨을 고르고 다시 일상을 살아가게 할 쉼표를 찍는 것과 같은 꽤 필요한 일임을 또한 깨닫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제, 눈 앞에 다가오는 모든 기념일을 기쁘게 맞이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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