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입는 방식

'셔츠'로 소비하는 날씨

by 메모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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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셔츠를 입는다. 소매 단추를 풀어 팔을 툭툭 걷어 올린다. 바스락거리는 면의 감촉이 경쾌하다. 30도가 넘어간다는 일기예보를 확인한 날에는 셔츠를 꺼내는 손이 잠시 머뭇거린다. 이 정도 날씨에는 반팔을 입어야 하나 싶다가도 어쩐지 반팔은 내키지 않는다. 반팔 한 장 달랑 입는 가벼움이 영 마땅치 않다. 청바지에 흰 반팔티를 입는 로망과는 다른 결의 가벼움이랄까. 반팔 입은 내 모습은 애매하게 허전하다.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그 허전함에 좀처럼 반팔에는 마음이 가지 않는다. 흰색 린넨셔츠를 꺼내 입는다. 두 번 접어 올린 소매가 팔꿈치 아래에 경쾌하게 떨어진다. 듬성듬성 보이는 주름에서 느껴지는 느슨함이 편안하다. 역시 반팔보다 셔츠라고, 거울 속의 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옷장 한 칸은 셔츠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왼쪽부터 흰색으로 시작하는 셔츠는 분홍, 주황, 빨강 체크를 지나 민트, 카키, 네이비와 그레이, 검정까지 이어진다. 얇은 코튼과 린넨, 옥스퍼드와 모달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섞여 있다. 빈틈없이 빽빽이 걸려있는, 거의 모든 계절에 마주하는 칸. 숨통을 틔워줄까 싶어 덜어낼 것을 찾지만 어쩐지 쉽게 골라내기가 어렵다. 서너 번을 훑어가며 고민하다 손이 잘 안 가는 셔츠를 꺼내 왼쪽 팔에 걸쳐 올린다. 꺼낸 옷은 여섯 벌 정도. 살펴보니 주로 겨울에 입는 것들이다. 플란넬 체크 셔츠와 코듀로이 셔츠가 빠진 옷장은 한결 경쾌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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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입던 스웨터를 정리하고 나면 셔츠에 유난히 애정이 간다. 부드럽고 포근했던 스웨터의 무게를 덜고 가벼운 셔츠로 새 계절의 공기를 입는다. 서늘한 공기가 습기를 머금고 찐득해질 때까지 더 얇아지고 점점 가벼워지는 셔츠의 촉감을 느끼면서 계절이 바뀜을 실감한다. 한낮, 내리쬐는 쨍한 해에 입고 있는 셔츠가 버겁다 느껴지면 이제 여름에 정점에 다다랐음을 느낀다. 여름을 실감하는 나만의 방식. 나에게 여름은 셔츠의 질감과 바람의 온도로 찾아온다. 셔츠를 통해 나는 여름의 디테일을 천천히 읽는다.

이제 다가오는 여름을 두 팔 벌려 맞이한다. 땀이 흐르고 바람조차 뜨거워지는 날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셔츠를 입을 것이다. 반팔보다 단정하게, 소매를 걷어 올려 답답하지 않게, 그리고 나답게. 여름을 즐기기 가장 좋은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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