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애벌빨래 -내 안의 목소리와 마주하기

2-1. 무너짐, 세탁기가 멈춰버린 순간

by 정경

2-1. 무너짐, 세탁기가 멈춰버린 순간

"괜찮아, 다 지나갈 거야."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넌 할 수 있어."


지난 26년 동안 내가 나에게 가장 자주 던졌던,

그러나 가장 잔인했던 거짓말들이었다.

타인에게는 한없이 따스하고 너그러운 위로였을지 몰라도,

나 자신에게는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날카로운 채찍질이었다.


긍정이라는 이름의 하얀 세제를 들이부으며

쉼 없이 인생을 돌려왔을 때,

내 마음의 세탁조 안은 이미 씻겨 나가지 못한

해묵은 오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그들의 편안함을 챙기느라

정작 내 마음의 배수구가 꽉 막혀

썩은 물이 역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눈을 감고 외면하며 살아왔다.


마흔셋, 어느 평범하기 그지없던 오후였다.

싱크대 앞에 서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설거지를 하던 중이었다.

쏴아아— 내리는 차가운 물소리 사이로

갑자기 기괴한 웅성거림이 파고들었다.

아니, 그것은 외부의 소음이 아니었다.

내 안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방에 가두어 두었던

기억들이 일제히 지르는 비명이었다.


교묘하게 나를 휘둘렀던 가스라이팅,

내 진심 어린 노력을 한순간에 깎아내리던 비수 같은 비난들,

그리고 그 모든 부당함 앞에서도 입술을 깨물며

침묵해야 했던 억울함의 잔해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네가 잘못한 거잖아!", "그때 이 말을 했어야 했는데…!"

머릿속은 시도 때도 없이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가 되었다.

그때 차마 내뱉지 못하고 삼켰던 말들이

예리한 칼날이 되어 돌아와 나를 사정없이 찔러댔다.

억지로 눌러 담았던 분노와 슬픔이

가슴속에서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 안의 엔진이 '덜컹' 소리를 내며 멈춰버렸다.

과부하가 걸린 세탁기처럼 온몸이 미세하게,

그러나 격렬하게 떨려왔다.

단순히 잡념이 많은 수준이 아니었다.

숨은 턱 끝까지 차올라 공기가 폐부까지 닿지 않았고,

물기 젖은 손끝이 바르르 떨려 쥐고 있던 그릇을 놓칠 뻔했다.

심장은 터질 듯이 방망이질 치는데,

정작 입은 본드라도 붙인 듯 단 한 마디의 신음도 내뱉지 못했다.

가슴 중앙이 거대한 돌덩이에 눌린 것처럼 답답해졌고,

명치끝에서는 뜨거운 화염이 치밀어 올랐다.


그때 직감했다.

'아, 이 소음들을 지금 떨쳐내지 못하면, 정말 내가 죽겠구나.'

생존을 위한 처절한 본능이 꿈틀거리는 동시에,

거대한 두려움이 나를 덮쳤다.

'나, 정신병인가?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공포가 엄습해 나를 잠식하려던 그 찰나,

지독한 어둠의 끝에서

아주 작지만 선명한 의문 하나가 빛을 내며 싹텄다.


'왜 나는 늘 사과하고 있었을까?'

내가 정말 잘못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상대의 기분을 맞춰주고,

갈등을 피하고,

상황을 좋게 마무리하기 위해

내 인격을 스스로 짓밟으며 건넸던 비굴한 배려였다.


나의 희생을 당연한 전유물로 여기는 관계들 속에서,

'착한 딸'이라는 굴레에 갇혀,

혹은 '책임감 강한 동료'라는 가면을 쓰고 강요당했던

그 무수한 역할극들.


그 26년의 세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나 자신을 위해 정당하게 화내거나 싸워준 적이 없었다.


이 지옥 같은 소음과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간절함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래, 이제는 고쳐보자.

더 이상 오물을 덮어둔 채 '괜찮다'는 가짜 세제를 뿌리지 말자.

이 지독한 찌든 때를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해 보자.


비명을 지르며 멈춰버린 나의 세탁기.

이제는 그 무거운 뚜껑을 열고,

엉망으로 엉킨 채 썩어가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차가운 현실의 물 앞에 놓아야 할 시간이었다.

내 인생의 진짜 치유, '애벌빨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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