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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ㄱㅣㅇㅓㄱ May 29. 2017

[안거리]“나는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공간”

      기억공간 Re:born을 인터뷰하다.

안녕. 난 제주도 선흘에 있는 ‘기억공간 Re:born’이라고 해. 다들 그냥 기억공간이라 부르는 것 같아.


우선 내가 사는 곳에 대해 먼저 소개할게. 선흘의 ‘선’은 ‘서(立)’에 ‘-ㄴ’이 붙은 것이고, ‘흘’은 돌무더기와 잡풀이 우거진 곳을 의미하는 제주도 방언이래. 지금은 착할 선善에 우뚝 솟을 흘屹로 표기하고 있지만 아마도 내 추측이 맞다면 이곳에 ‘곶자왈’이 있어 유래된 이름 같아. 지구의 허파가 아마존이듯, 곶자왈은 제주도의 허파라 불리는 숲이야. 곶자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 되면 해줄게.


내가 소재한 선흘 2리는 해발고도 200~400m 정도의 중산간 평지야. 북쪽에 붙어있는 선흘 1리와는 달리 지대가 높아 감귤보다는 도라지, 더덕, 콩이나 산채류 등을 재배해 마을 수익을 올리고 있어.


나는 지난 2015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1주기 때 처음 이름이 생겼어. 원래 소를 기르는 이름 없는 외양간이었거든. 축사나 창고는 특별히 호명되지 않으니까.


먼저 이문자 할머니(89)의 소개로 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아.


젊은 시절 남편과 사별한 할머니는 생계를 위해 소를 기르기 시작했어. 집 앞 들판에서 젖소 3마리를 길렀는데, 얘들이 새끼를 낳아 9마리나 된 거야. 가축수가 많아지니 축사의 필요성이 생기지 않겠어? 할머니는 함덕에 사는 목수에게 부탁해 나를 만들게 했지. 하늘이 파랗던 어느날, 나는 우사로 만들어진 거야.


소들이 할머니를 위해 무럭무럭 젖을 짜는 동안 자식들도 쑥쑥 자라 시집 장가를 갔어. 목축일을 돕던 막내딸이 시집을 가면서 할머니에게 그 일을 접으라 강권하더라. 엄마 혼자 고생하는 모습 보기 힘들어 그랬던 거지. 딸 근심 더하기 싫어 “그럼 자기 모르는 사이 소를 팔아 달라” 부탁했는데 그만 소가 팔려가는 모습을 보고 만 거야. 할머니는 들판에 주저앉아 팔려가는 소들을 보며 엉엉 우셨어. 그 흐느끼는 작디작은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나는 움직일 수 없으니까.


소가 떠난 뒤 나는 창고 역할을 했어. 잔치가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와서 음식을 만들기도 했고, 근처에 있는 샤라의 정원이 효소를 만들면 이곳에 보관하기도 했지. 그렇게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황용운씨(남·36)가 나를 찾아온거야.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지.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304명이 수장됐다고? 사람들 말에 따르면 당시 국가는 단 한 명도 구조하지 않았고, 한 나라의 구조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그 사고에 대한 진상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다며. 왜?


내가 겪은 황씨는 단순하면서도 무모할 정도로 진취적인 사람이야. 오래 고민하는 법이 없지. 그는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을 위해 광화문에서 시위를 하다 구치소에 이틀 감금됐대. 정의가 쇠창살에 갇히는 현실을 몸소 겪으며 ‘사회문제는 곧 내 삶의 문제’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해.


그해 겨울, 황씨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세월호가 당도하려던 제주에 기억공간을 만들기로 결심했대. 내가 뭐랬어. 무모하다고 했지. 연고도 없이 제주로 왔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나를 만난거야. 그게 아마 2015년 2월이었지.


황씨가 나를 찾아오게 된 계기는 복잡하고 길어. 바람도서관 대표 박범준씨(43)와 할머니 아들인 김상수 단장의 얽힌 이야기가 있거든. 이 이야기는 침묵에 부쳐두고.


암튼 그는 나를 보자마자 황망한 표정을 지었어. 표정을 감출 줄 모르는 사람이거든. 당시 나는 지붕이 낡고, 공사가 중단돼 여기저기 폐자재나 잡동사니들이 널브러져 있었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폐허가 된 나를 보고 막막했다고 해. 세월호 참사 1주기까지 2달 밖에 남지 않았으니  ‘얘를 어떡하면 좋지’ 한 거지.


곧 사람들을 모아 내 지붕을 고치고, 빨간 대문을 만들어줬어. 시간이 빠듯했지만 다행히 돕는 손길이 많아 가까스로 2015년 4월 16일 나는 ‘기억공간 Re:born’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어. 기억공간. 많은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지. 마당 입구에 입간판이 세워졌을 땐, 아직 황씨에게 말한 적 없지만 처음으로 내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 것 같은, 그러니까 내게도 당신들이 말하는 ‘정체성’이 생긴 기분이었달까.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이 소띠였다고 들었어. 나는 우사였던 시간을 품고 있고, 또 소의 눈망울을 간직한 아이들의 기억도 품게 됐지.


나를 찾는 사람들은 망각을 두려워해. 이상하지 않아? 고통은 빨리 잊어야 괴롭지 않은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자꾸 기억해야 한다니. 그래서 다녀간 사람들의 “잊지 않겠다”는 구호가 노란 나비처럼 내 벽에 앉아 있어. 황씨가 그러는데 부조리한 사태를 너무 쉽게 잊으면 기울어진 사회는 침몰한대. 기억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시대라 내가 만들어진 거라는고. 그 말을 곱씹어보니


나는 존재하지 말아야 할 공간이었던 거야.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당신들의 사회가
행복했다면 말이지.


종종 내막에 어두운 마을 사람들이 우사에 납골당을 들여놨다며 할머니를 속상하게 만들기도 했어. 그런 날이면 할머니는 나를 찾아와 그들을 욕하며 속을 달랬지.


할머니에겐 황씨가 젊은 시절 기르던 소 같은가 봐. 수시로 나를 기웃거리며 용운씨가 잘 있나 살펴보기도 하고, 밥도 차려주고, 말도 건네. 할머니도 그를 황씨라고 부르는데(사실 내가 할머니를 따라 부르는 거지만) 황씨가 어디 멀리 가면 이젠 서운할 것 같다 하시더라.


그 일이 있고 벌써 세 번째 봄이 지나가네. 그간 좋은 일이 생겼다던데. 좋은 일이라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기다림의 수심을 견디던 세월호가 인양됐다는 소식을 들었어. 바닷속에서 녹슨 선체가 수면 위로 올라오자 다들 희망을 엿보는 동시에 허망했다며. 이리 쉽게 인양할 수 있는 것을…9명의 미수습자도 하나 둘 돌아오고 있다니 모두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길 나도 간절히 바랄뿐.


사실 304명의 죽음이 나는 너무 무거워. 소와 함께 무료하면서도 다정한 일상을 지내던 이름 없던 때가 그립기도 하고. 이곳을 다녀가는 사람들의 발밑에 희망이 묻어 있기에 지금까지 견뎌온 것 같아.


나는 박씨가 운영하는 바람도서관과,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을 위한 전시공간이 공존하고 있어. 그래서 나의 외벽 절반은 책으로 채워져 있고, 절반은 세월호 관련 전시가 늘 열리지. 지금까지  <아이들의 방>, 2주기 프로젝트 전국 순회 전시 <두 해 스무네 달>, <고래의 꿈> 등 다양한 작품들이 걸렸어. 지난 25일부터는 <세탁소> 전시가 열리고 있으니 혹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화요일만 빼고 언제든지 나를 만나러 와. 나 화요일엔 쉬거든.


바쁠 텐데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 나의 벽에 붙어 있는 나비의 기억들이 훨훨 날아가길 바라. 내가 사라져야 한대도.



인터뷰어_박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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