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ㄱㅣㅇㅓㄱ Jul 24. 2017

[커버스토리] 기억, 공간, re:born

기억 윤리와 공간의 가치


세월호 기억공간 re:born(제주도 선흘, 이후 기억공간)이 개관 1171일 만에 공존공간 선흘창고에서 짐을 뺐다. 더 좋은 장소가 생겨 호기롭게 이전하는 것도 아니요. 진상규명의 뜻을 다한 것도 아니니 ‘뺐다’는 능동보다 ‘밀려났다’는 피동이 더 어울릴 것이다. 여기서 ‘쫓겨났다’ 대신 ‘밀려났다’고 쓰는 까닭은 ‘나가달라’는 강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측의 치사함을 견디다 못해 자진 퇴사하는 어느 직장인처럼 기억은 공간을 (비)자발적으로 잃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인근에 창고를 소유하고 있는 기억지기(기억공간 자원활동가) 선생님의 배려로 지난 6월 말 오갈 데 없는 짐을 옮겼다. 바람도서관 측은 위로금 명목으로 초기 공사비용의 약 1/4을 손에 들려줬다. 수도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한 창고에서 석연치 않은 위로를 받고 있는 기억.


수박의 사건
기억은 단면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탁자 중앙에 기억이 놓여 있다고 가정하자. 기억은 지난해 여름이라고 치자. 여름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으므로 구체적인 수박으로 치환시키기로 하자.

탁자 중앙에 수박이 놓여 있다. 수박은 다시 말해 지난해 여름의 기억이다.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수박을 그린다. 수박은 구의 형태를 띠고 있어 어느 쪽에서 그려도 원이다. 그러나 서 있는 좌표에 따라 줄무늬의 미세한 차이가 나타난다. 꼭지의 방향도 제각각이다. 어떤 그림은 수박 껍데기에 손톱만한 생채기가 나 있다. 반대쪽에서 그린 수박은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하다. 색은 더 제각각이다. 짙은 초록색만 띤 그림이 있다면 배꼽 부근이 누런 수박도 있다. 초록의 농도도 검은색 무늬의 선명함도 천차만별이다. 그림 좀 그릴 줄 아는 사람은 수박의 형태를 지우고 색으로만 그 인상을 표현한다. 누구는 수박의 잘린 단면까지 그린다. 꼭지를 생략한 그림도 눈에 띤다. 심지어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수박이 놓인 본래의 장면을 ‘수박의 사건’이라 부르기로 하자. 작업을 마친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공간에 ‘수박의 사건’을 전시한다. 수박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누군가 그려놓은 수박을 통해 ‘수박의 사건’을 유추한다. 배꼽 부근이 누런 것으로 보아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한 수박이 있었군. 이토록 선명한 검은색 줄무늬라니! 맛있겠다. 수박에 생채기가 심했던 모양이야. 꼭지가 없는 수박이네. 좌우대칭이 완벽한 탐스러운 수박이 존재했군.


기억은 장면의 단면이므로 평면적이다. 따라서 3차원의 공간에 놓인 ‘수박의 사건’을 다각도에서 조망하기 위해서는 그림이 아닌 그림‘들’이 필요하다.


기억투쟁
수박을 다시 기억으로 환원하자. 기억은 지극히 개별적이고 주관적이다. 조망한 좌표에 따라 왜곡되고 조작된다. 장면의 단면일 뿐인 기억은 불확실한 존재다. 누가 기억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사건의 본질이 달라지는 이유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교과서를 무리하게 밀어붙이려고 했던 까닭도,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시민들의 구호가 정치적 세력으로 몰렸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역사란 기억을 장악한 권력에 의해 통제된다.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탐스러운 수박 그림 하나를 선택한 뒤 “이것이 우리가 지나온 지난해 여름”이라고 규정한다. 장악된 기억은 복제되고 복제돼서 백지상태의 세대에게 전달된다. 날조된 기억은 어느 세대의 전체가 된다. 기억 장악 프로젝트에 “아닌데. 우리가 지나온 여름은 그게 아닌데. 내가 본 수박은 다른데” 라며 토를 달았으니 권력자의 심기가 사나워졌을 테다. 사회를 통제하려는 이들에게 기억주체는 반동분자일 수밖에 없다.


공간의 가치

2014년 4월 16일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목도했다. 우리가 일임한 권력이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일단 침몰하고 있는 국가부터 구하자. 그러기 위해 시민의 권력을 되찾자. 기억하자. 우리가 기억하자.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기억공간은 광주 518기념문화센터나 제주 4·3평화공원처럼 기억을 장악하려는 세력으로부터 기억을 지키기 위한 기억투쟁전선이다.


박근혜 탄핵을 위해 광장에 모였던 촛불은 일순 밝혀진 것이 아니다. 동학 농민운동, 3·1만세운동, 419혁명, 6월 민주항쟁 등 시대의 광장을 채웠던 시민의 불꽃이 우리에게 옮겨 붙은 것이다.


가만히 있다가 침몰한 한 사회의 기억을 세월호가 당도했어야 할 제주에서 모으기로 한 까닭도 이곳이 다음 세대의 불꽃이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공간은 수박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광장의 역할을 한다. 공간이 없었다면 그날을 기억하는 시민들의 좌표는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사건의 진상眞相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박의 사건'을 최대한 왜곡 없이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날의 단면들을 모아 장면을 구성해야 한다.


그런데 공간을 잃었다.


기억의 윤리
인간은 힘들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런 기억을 의식 밖으로 밀어내려 한다. 이것은 생존 본능이다. 즐겁고, 유쾌하고, 자랑스런 기억들은 추억으로 각색한다. 이것은 쾌락 본능이다. 따라서 망각이나 왜곡없이 기억한다는 것은 윤리적 가치를 본능의 욕구 위에 놓는 일이다. 기억행동은 의식을 깨어있는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사회적 주체로서의 권리주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치스런 순간까지 직면해야 하기에 고통스럽다.


기억은 과거에 대한 현재의 증언이며 미래의 품격을 만드는 성찰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신채호 선생의 기억강령이 시대를 막론하고 여전히 유효한 까닭이다.


다행히 기억윤리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방팔방 장소를 물색하고 있다. 정권이 교체된 시점에 뜻밖에 찾아온 휴지기는 기억공간의 사회적 좌표를 점검하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떠나온 자리에 석연한 안부를 물으며 우리 모두 다시 모일 그날을 위해 re:born!



글쓴이: 박소희


작가의 이전글 당신이어서 고맙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