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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ㄱㅣㅇㅓㄱ Jan 28. 2018

02. 어쩔 수 없으니까

[08_minifiction]


전깃줄에 앉아있던 철새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비둘기색 양복을 차려입은 사나이는 광장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사나이는 엘리베이터 내벽에 부착된 거울을 보며 검정 줄무늬가 있는 감색 넥타이를 고쳐 맸다. 거울 하단에는 목디스크 전문이라는 경희한의원 광고가 새겨져 있었다. 사나이는 뻐근한 목을 좌우로 천천히 돌렸다. 거울 속 사나이도 좌우를 바꿔 움직였다. 거울에 누군가의 지문이 찍혀 있었다. 사나이는 와이셔츠 소매 끝으로 지문을 닦고 옷매무시를 다시 했다. 그의 아버지는 ‘거울은 항상 깨끗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사람들은 지하철역까지 가는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사나이도 줄을 섰다. 줄은 점점 길어졌다. 버스가 도착하자 줄이 버스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버스는 얼마 가지 못하고 교차로 신호대기에 걸렸다. 교차로는 좌회전하면 419탑 방향으로, 직진하면 지하철역으로, 우회전하면 북한산시티 대단지로 이어졌다. 지금은 스캔들로 활동이 뜸한 배우가 재개발 당시 아파트 분양권 광고에 출연했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줄을 잡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화면 배경에는 북한산 능선이 펼쳐져 있었다.


신호를 받은 차들은 대부분 직진했다. 대열의 선두에 서 있던 마을버스도 급출발을 시도했다. 앉지 못한 사람들이 중심을 잡기 위해 손잡이를 꽉 잡았다. 손잡이조차 잡지 못한 사나이는 버스 뒤쪽으로 몸이 밀렸다. 사나이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근처에 있는 한 사람의 허리를 안았다. 그러다 검은색 구두를 신은 다른 사람의 발을 밟고 말았다. 사나이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발을 밟힌 사람은 미간을 찌푸리며 구두를 털었다. 옷이 흐트러진 사람은 진회색 양복 상의를 고치며 헛기침을 했다. 그들은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나이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사나이는 얼굴이 달아올라 차창 밖을 내다봤다. 좌회전하려는 차들은 자신들의 차선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이따금 우회전하는 차들도 있었다. 사나이는 의자 손잡이를 잡기 위해 사람들 틈을 헤집었다. 여기저기서 짜증 섞인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지만 사나이는, 못 들은 체했다.


속력이 붙은 버스가 터널에 들어섰다. 터널만 지나면 지하철역이다. 그때 어떤 물체가 도로로 뛰어들었다. 버스 앞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안 돼.」

누군가의 비명이 날카롭게 울렸다.

「멈춰요.」

누군가 소리쳤다.

「뒤에 차들이 있어서 그건 위험해요.」

누군가 만류했다. 버스는 비상등을 깜빡이지 않았다. 사나이는 손잡이를 세게 잡았다.


글쓴이. 박소희 


미니픽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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