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다가 누군가의 말에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상처받는 내내 내 안에 작고 여린 것이 자각된 며칠을 보낸다. 평소에 보지 못한 그 작고 여린 것이 이상하게도 당찬 힘이 있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무엇인가를 그리고 싶게 하고 무엇인가를 연주한다거나 글을 쓰게 만든다.
내 안의 작고 여린 것이 있다는 것이 문득 반가워지는 순간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지 않았으면 존재를 모르고 지나쳤을 그 평상심밑에 잔류되어 있던 마음하나가 나를 어떤 것에 도전하게 하는 희한한 의지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우친 때이기도 하다.
쉽게 상처받는다는 성향은 한 사회 속에서 삶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환영받지 못한 일이지만
쉽게 상처받는다는 것은 세상이 던진 반응에도 여전히 반응하는 그 사람 안에 아직 작고 여린 것이 남아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 순간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의미로 바뀐다.
그 어떤 말에도 무감하게 흘려보낼 수 있고 그 어떤 일상도 균형력을 잃지 않고 흘러가는 것은 좋을 수는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내 안의 감수성을 잘 느낄 때에는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받을 때이다. 물론 그 순간은 분노하거나 누군가 내 편을 들어주거나 나의 태도가 인정받아지길 바라는 부분이 크지만 에고의 불평불만을 벗어나는 순간 내 안에 아직 이 여린 부분이 있다는 것이 희귀한 일인 것처럼 여겨지는 자각이 온다.
그것이 미래의 누군가를 더 크게 이해할 수 있는 날을 부를 것이고 내 안의 현실보다 더 굉장한 일들을 불러올 수 있도 있을 것이다. 실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창조할 때 여린 마음하나가 의지를 펴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마음의 시작도 기적 같은 큰 뜻에 닿을 수 없을 것이다.
내 집 앞의 바람하나가 작은 마당을 쓰다듬고 무수한 새들을 실어온다. 햇빛을 두른 몸으로 잎사귀에 두르는 공중은 넓은 천공이 될 준비를 하고 내 앞에 앉았다.
그러므로 내가 이미 상처받았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굉장히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내 안의 작고 여린 것이 드디어 세상에 나와 제 길을 스스로 만들어갈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드디어 의지를 부릴 때 그 마음은 작고 여린 자신만의 공간을 기꺼이 탈피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그 사람만의 연주실력이라 칭하고 그 사람만의 아름다운 문체라며 읽는다.
작고 여린 것들에 기대어져 나온 그 사람만의 감수성의 유영은 곧 수많은 마음들과 연결되어 큰 세상을 이룬다.
한여름밤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 아카시아향이 맡아지는 때처럼 어느 때, 어느 순간 작고 여린 것들이 기적을 품을 때에도 우리는 그 마음이 카리키는 방향을 보기 위해 뒤돌아 보는 마음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들은 여린 마음이 하는 일들이므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떤 일들의 예견앞에서 잠시 설렐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