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회사를 박차로 바로 나와버린 까닭은 차장의 말 때문이었다.
더는 내가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어떤 범주가 있는데 나는 범주를 넘어서는 사람이라고 했다.
차장의 논리의 끝은 결국 나의 퇴사였으므로 나는 논리를 가장한 인신공격성 발언들에 차장의 말이 맞기 때문에 그만둘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당장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내가 치를 값 치고는 과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덩치만 커버린 사람이 설득력 없이 펼친 말들이 허수아비처럼 느껴져 절로 웃음이 띄어졌다. 상사라는 직급만으로 말도 안 되는 말들을 참는 것도 그날 하루겠거니 했다. 덕분에 나는 예정했던 퇴사일보다 빠르게 퇴사할 수 있었다. 민간인이 되어서 상사라는 이유로 계속되는 훈계 아닌 훈계를 참고 듣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여전히 회장은 나이가 칠십이 넘어서도 마주치는 여자 직원들의 엉덩이를 토닥였고 상사들은 만만한 신입직원들을 괴롭히거나 기분에 따라 의견을 무시하면서도 정치질을 잘해야 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을 했다.
회사를 퇴사하고 새로운 일을 하나씩 하기로 했다. 터닝포인트라 생각하고 회사생활에 피폐해진 정신을 가다듬고 나 자신의 중심을 찾아야 될 것 같았다.
문득 성당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회개할 게 있는 것보다는 누군가의 회개를 받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무엇인가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의 공허가 심하게 밀려온 탓도 있었다.
바딤젤란드의 리얼리티 트렌서핑을 읽으며 공허한 시간을 보냈다. 조직의 역할은 개인이 자기 자신의 행복과 멀어지게 하는 것에 있는 것 같아 더 이상의 미련이나 억울함을 놓아버리기로 했다. 조직은 인격체가 아니니까. 그 어떤 것 이상을 기대한 나에게 보다 현실적인 감각을 일깨워주었다.
화원에 가서 로즈마리와 보스턴 고사리를 샀다. 로즈마리는 방안에 놓는 것보다 밖에 두는 게 좋다고 했지만
창가에 두니 저녁바람에 로즈마리 향기가 책을 읽는 공간 속으로 스르르 밀려들어왔다.
앞으로 어디를 향할지 알 수 없는 저녁에 나는 오직 개인이기 위해 존재해 보기로 했다.
사방에서 혼자두지 않기 위해 자꾸 내면 안에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해, 이직을 준비해야 해,라는 생각들이 밀려오지만 이 거대한 개인 안에서 나로서 존재하며 잠시 세상과의 법칙과 떨어져 있고 싶어졌다.
사회적 의무는 지독한 것이라서 종종 개인이 있는 방까지 따라오고는 하지만 나에게 지금은 영혼의 쉼이 필요했다. 어쩌면 그동안의 나에게는 나 개인의 부름보다는 사회의 부름에 따라 흘러온 것만 같다.
그렇게 너무도 쉽게 나를 타협해 온 것 같아, 한동안 나로서 존재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