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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타는지성인 Aug 28. 2023

친구들

그 해 남자들 사이에선 노래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인기가 결정되었다. 아니 적어도 갓 스물이 된 아직 고등학생티를 벗지 못 한 그들은 굳게 믿고 있었다. 적어도 남자들한테서 만큼은. 그래서 남자들은 고음을 한 껏 올릴 수 있는 락 발라드를 불렀다. 그중 가장 인기곡은 가시였다. 가시는 가장 잘 부르는 친구가 부르는 것은 우리들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마치 대장처럼. 그렇기에 정혁은 매 번 가시를 다른 친구들에게 양보했다. 정혁은 사실 부르는 노래가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였다. 하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는 정혁이 부르기엔 고난이도의 노래였다.  

     

화장실을 가고 싶어 졌을 때, 손을 들고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확인 한 이후론 마음 편하게 화장실을 갔다. 적응이 되자 대리출석도 해주고 부탁한 적도 있었다. 물론 완벽하게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두꺼운 전공책인 물리화학책을 가방에 넣을 수 없어 들고 다녔다. 정혁은 그때 진짜 대학생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특히 봄의 날씨가 좋았다. 주변엔 어느새 친해진 남녀로 짝이 된 무리들이 보였다. 정혁은 3명의 남자들과 같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진짜 대학생은 저거구나. 정혁은 곧 여자인 친구들과 노는 것을 상상했다. 정혁을 비롯한 3명의 친구들은 소나무 아래에서 서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이래선 안된다는 것을, 이렇게 시간을 흘러 보내 선 안된다는 것을.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건 태성이었다.

“우리도 하자.”

정혁은 태성을 비롯해서 친구들의 눈을 보았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네 명은 손을 모았다.

“하자!”

경기에 나가기 전 선수들의 비장한 각오처럼 느껴진 정혁이었다.  

   

정혁은 고등학교때와 다른 환경에서 친구를 만들 수 있을까 걱정을 한 적이 있었다. OT때 그런 걱정으로 마냥 앉아 있었다. 공식행사 후 쉬는 시간이 끝나고 방이 배정되었다. 방이 배정되고 정혁은 친구들을 한 명씩 봤다. 정혁은 자신과 비슷한 느낌의 친구들이라 생각했다. 다들 어색해했으니까. 모두 어색한 분위기에 술을 앞에 줄을 세워두고 있었다. 먼저 정혁에게 말을 건 건 태성이었다.

“어디서 왔어?”

“대구.”

“오 멀리서 왔네.”

“멀지. 3시간 정도 걸리데.”

“오 사투리 처음 들어봐.”

“이 정도면 서울말 아니야?”

태성은 그 말을 하고 다른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러 간다며 자리를 일어섰다. 정혁은 자신의 억양이 독특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최대한 사투리를 쓰지 않도록 의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자 같은 과의 다른 방, 남자들과 여자들이 들어왔다. 곧이어 방을 나갔던 태성이 이 방에 배정되었다며 다시 들어왔다.

“곧 선배님들 오신다고 하니까 그때까지 인사 나눠볼까요.”

잠깐동안 같은 방에 있었던 사람들과는 달리 다른 방의 사람들은 더 낯설었다. 정혁은 그때 처음 알았다. 첫눈에 반할 수 있다고. 자기소개를 했는데 이름은 미정이라며 재수를 했다고 말했다. 정혁보다 1살 많은 누나였다. 정혁은 미정을 계속 쳐다봤다. 혹시나 술이 엎어지지 않을까.


정혁이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신 건 처음이었다. 처음 먹었을 땐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술이 쓰디쓸 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쓸 줄 몰랐다. 그 이후론 먹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쓰긴 썼는데 남들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었다. 잘 마시는 것. 그것이 남자의 길.

눈을 뜨니 테이블 밑이 보였다. 테이블 밑 의자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서 신기하게 자고 있었다. 정혁은 테이블 밑 생김새를 자세하게 쳐다보아야 했다.

“깼어?”

태성이었다.

“응 어제 나 뭐 했나?”

“아무 일 없었어. 술 한 번에 엄청 마시고 저 테이블로 들어가서 자던데? 쟤들도 아직 잔다 더 자.”

정혁은 미정이 있는지 한번 더 봤다.

“야 당연히 여자들 방에 갔지. 너 어제 미정 누나만 보더라.”

“아닌데.”     


정혁은 그날 이후로 망했다고 생각했다. 술을 많이 먹으면 필름이 끊길 수 있다는 것,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이제 끝났단 생각으로 공부를 하고 군대를 가기로 다짐했다.

“가자 군대!”

시간표를 함께 짜는 날, 공용 컴퓨터실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결국 택한 건 PC방이었다. 운이 좋게도 자리가 있었다. 시간표를 짜는 것, 흐트러진 퍼즐에 내 마음대로 퍼즐을 끼우는 것, 자고 싶을 때 자고, 나오기 싫은 날을 만들고, 과목을 원하는 대로 넣는 것.

그 결과 정혁과 3명의 친구들은 모두 같은 시간표를 기적적으로 맞추는 데 성공한다. 스타 2:2를 하고 나온다. 정혁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남들보다는 스타를 잘한다는 것을 알았다. 고등학교 때 틈틈이 플레이했던 게 실력 차이가 나는 원인인 듯했다. 그리고 정혁은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자신과 태성 그리고 늘 멋있어 보이는 한 친구, 그리고 유독 말이 없는 친구. 저 친구는 정말 말이 없이도 우리와 잘 어울린다는 것이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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