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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통 글을 쓸 시간이 없다. 아니, 물리적 시간은 있는데 글이란 것이 쓰이려면 생각보다 많은 필요충분조건이 요구되는데, 사유할 심적 여유, 멍 때릴 환경, 손가락을 움직이는 연료인 독서(심리학 책 제외..)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뭐라도 남기고 싶은데 뭐라도 남겨야 할 것 같아서 짧게 쓰는 글.
1. 2025년 연말은 달랐다. 뭐 특별한 성과를 거뒀다거나 느닷없는 희소식을 들었거나 그런 것이 아닌, 감정적 동요가 거의 없는 상태로 맞이한 것이 가장 달랐다. 무언가 멜랑꼴리하고 공허하달까, 그런 느낌을 최근 몇 년간 계속 받아왔는데 이번엔 깔끔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떠내 보내야 할 것들을 잘 흘려보내서 그러지 않았나 싶다.
2. 이게 무슨 소린가 하면, "잘 사는 건 잘 흘려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 <윤희에게>를 마침내 봤다. 최애 예능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방구석 1열>에서 다룬 것을 보고 언젠가 봐야 할 영화 목록에 올려뒀는데, 모든 일엔 때가 있듯이 '지금이야 이 영화를 볼 타이밍'이 딱 2025년 12월에 찾아온 것이다. 기억에 남은 건 새하얀 눈, 담백한 톤, 마지막 내레이션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야"이지만, 마음을 울린 장면은 따로 있다. 윤희의 전 남편 인호가 찾아와 재혼 소식을 알리는 씬이다. 인호는 조심스럽게 청첩장을 건네고 윤희는 건조하게 받아 든다. 그리고 인호는 "미안하다"며 운다.
3. 왜 울지? 이 영화를 개봉 직후에 봤거나, <방구석 1열>을 본 직후에 봤다면 머리에 물음표만 띄우고 넘겼을 거다. 어쩌면 영화 자체가 기억에서 가물가물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영화 속 그 장면이 아름다워서 찔끔 울었다. 상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무언가가 영영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두 사람의 감정선이 아름다워서.
4. 영화를 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짧은 일정으로 스위스를 다녀왔다. 마음의 고향인 스위스에서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이야기를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왜 울지? 시작을 앞둔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반짝임,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일으키는 파동.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과정을 지켜본 주변인으로서 친구의 결단이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뒷붙여 (더 근본적인 이유도) 말했다. "나도 일찍 깨달았더라면 어땠을까."
5.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잠깐 멈춰서 탐색해 봤으면 어땠을까. 여기서 저기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안식처를 찾아다닐 생각일랑 멈추고 스스로 안식처가 될 시도를 했으면 어땠을까. '이제 내 앞에 펼쳐지는 건 행복일 거야'라고 믿었던 그 시절 내가 떠올랐고, 웬만해선 하지 않는 생각도 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6. 그런데 연말을 연민이나 후회, 슬픔 속에서 보내지 않았다. 그 눈물은 인호가 윤희에게 청첩장을 건네며 흘린 눈물과 비슷했던 걸까. 그 시절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고, 나에게서 아주 영원히 떠나가 버렸다는 것을 그때, 망원동의 어느 작은 식당에서 몸으로 느꼈던 것 같다.
7. 2019~2021년은 나를 완전히 부수는 해였고, 2022년~2024년은 이 악물고 바닥부터 다시 쌓아 올린 해였다. 2025년은 지금까지 쌓아 올린 벽돌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고르며 미처 버리지 못했던 것들을 떠나보낸 해이지 않았을까. 이미 한참 전에 떠났는데 이제야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비우니 홀가분하다. 끌어안고 있을 땐 공허했는데. 하, 그래도 빗질할 때마다 왼쪽 머리카락 사이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흰머리 가닥들은 수용하기 아직 힘들다...
8. 2026년은 60년 만에 불의 기운이 가장 강력한 해라고 한다. 또 한 번 타이밍이 기가 막힌 게 올해 나의 0순위 목표는 석사 졸업이다. 불의 추진력 버프 좀 제대로 받아서 한 번에 논문 통과 되기를. 비나이다 비나이다.
9. 요즘 내 기분을 가장 좋게 하는 건 미세하게 길어진 일조량이다. 일조량에 죽고 사는 나 같은 사람에겐 한반도의 혹독한 겨울에 이보다 더 희망적인 신호는 없다. 일몰로 가기 전 오후, 맞은편 주상복합단지 유리창에 반사된 햇빛이 우리집 통창으로 쏟아지는 시간이 있다. 12월에는 4시 30분이었는데, 오늘 청소하다 보니 5시였다. 해가 뜨는 시간도 해가 지는 시간도 더 빨라지고 더 늦어지는 것이 피부에 와닿는다. 2월 되면 밖에 나가 좀 뛸 수 있으려나. 아 이틀 뒤가 2월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