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주의: 영화 <세계의 주인> 내용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으나 암시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11월은 위험한 달이다. 늦여름이나 마찬가지인 9월을 지나 이제 조금 가을날을 만끽하나 싶었는데 가을장마란다. 10월에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릴 수 있는 건가? 아직 가을과 제대로 만나지도 못한 것 같은데 벌써 겨울이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다. 나날이 줄어드는 일조량, 날카로워지는 바람, 벌어지는 일교차. 트렌치코트는 10번을 채 입어보지 못하고 패딩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그래서 밉다. 11월은 아무 잘못이 없지만…
건조해지는 공기만큼 푸석해지는 피부만큼 뭔가가 같이 메말라가고 있었다. 혈중말랑함(?)농도랄까. 학기 시작 후 읽고 쓰는 것들이 논문, 심리학 문헌, 상담 사례 보고서이다 보니 감수성은 딱딱해지다 못해 바스러져갔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한 가지 발견하게 된 사실은 몸과 마음의 밸런스 못지않게 독서의 밸런스도 나란 사람의 주관적 웰빙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거다. 학기 중, 다시 말해 '읽기'에서 논문과 심리학 문헌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할 때는 그렇게 문학이 읽고 싶다. 그래서인지 당장 읽지도 못할 책을 자꾸 사들인다. 그리고 방학하자마자 그간 읽고 싶었던 시, 소설, 에세이를 탐독한다. 그러다가 서점에 가면 자꾸 심리학 코너에 알짱거린다. 여기까지만 한다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으나, 이 밸런스가 깨졌을 때 삶의 만족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하루하루가 노잼이고 더 방치하면 우울해지고 그럼에도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무기력 상태가 되어 하루 종일 망할 스마트폰만 스크롤링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만다.
3주간 노잼과 우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 발견한 영화가 화제의 신작 <세계의 주인>이었다. 지난주 참여한 집단 상담에서 만난 선생님이 학부 전공이 미술에 언젠가 영화를 만드는 게 꿈이라 했고, 그 선생님과 이야기가 잘 통해 점심시간에 영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의 영화 취향을 파악한 선생님은 내가 <세계의 주인>을 좋아할 것 같다며 아무런 정보도 찾아보지 말고 보라고 당부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마침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좋은 영화는 자꾸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도움이 되고 싶다'에서 '도움이 되어야 한다'로 마음의 축이 옮겨가는 상담실에서의 내가 떠올랐다. 선의를 가지고 한 행동이 결과적으로 내담자에게 마음의 부담을 더 지게 만드는 꼴이 되어버린 순간, 해결 방법에 골몰하느라 내담자의 다른 중요한 사인을 놓쳐버린 순간. 전부 내 욕심이다. 상담대학원에 다닌다고 했을 때 부동산 사장님은 이런 말을 했었다. "어휴, 우울한 이야기 계속 듣고 있으면 너무 힘들 것 같은데." 사실 상담이 힘들고 어려운 건 우울한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 보다는 투명하게 드러나는 '나'에 있다. 미해결 과제나 역전이 같은 고상한 이름표를 벗겨내고 날 것 그대로 말하자면 상담실에서만큼은 절대 보고 싶지 않은 '나'가 기어이 모습을 드러내는 데 있다. 뭘 그렇게 하려고 했을까. 그저 버티어주고 또 버티어주며 물과 휴지를 건네면 되는데. 물론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련하면 할수록 상담 기법 중 가장 어려운 건 경청임을 깨닫게 된다.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근처 서점. 처음부터 사려던 책을 찾은 후 시집 코너로 갔다. 홀린 듯 책장에서 두 권의 시집을 꺼냈다. 우연은 아닐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고른 시집 제목*에 모두 사랑이 들어가 있는 것은.
집으로 가는 길, 언젠가 보았던 책에서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던 문장이 기억났다.
*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 박연준의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