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밤의 짧은 글들

글쓰기 모임의 기록

by 이애리

사진: Unsplash


1.

날짜: 7월 10일

주제: 육체, 영원, 잃을 각오


우리의 본질은 육체일까, 영혼일까. 어릴 적부터 나는 영원을 꿈꿨던 것 같다. 세속적인 표현으로 바꿔 말하면 이름을 남기고 싶었다. 피와 살은 썩어도 남겨진 이름은 영원하니까. 엄마가 사준 위인전을 너무 열심히 읽은 탓이다. 그런데 이러한 열망이 꽤나 오랫동안 지속된 것으로 보아 진심으로 그것을 바랐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름을 남길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글을 택했다. 대단한 의도가 있기보다 육체가 해온 일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책 읽기가 좋았다. 그런데 책을 좋아한다고 모두 출판인이 되는 건 아니다. 생각해 보니 글쓰기가 더 좋았다. 학창 시절 원고지와 수채화 물감이 주어지면 항상 원고지를 골랐다. 그렇다 한들 이게 업으로 삼을 명분이 될까?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어떤 힘이 작용한 게 틀림없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보이는 것도 있으니까. 때로는 책의 판권 페이지에, 때로는 표지나 날개에 이름을 남겼다. 열망을 이뤘으니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펼쳐질 줄 알았다.


그 시간들은 모순으로 범벅된 덩어리다. 희망과 절망, 안도와 불안, 수용과 거부, 성공과 실패….

마지막으로 남은 건 망가진 육체와 정신적 공허함이었다.


우리의 본질은 육체일까, 영혼일까. 이름에 집착하던 나는 아마 후자라 믿었겠지. 읽고 옮기는 일은 혼을 갈아 넣어야 했다. 어떤 일에 혼을 넣으려면 몸에 있는 혼을 꺼내야 한다는 뜻이고, 다시 말해 응당 혼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혼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이름을 새기는 일은 육체의 생기를 꺼트리는 일이 되었다.



2.

날짜: 7월 17일

주제: 유지는 귀찮은 일이다. 빌어먹을 시간 전부를 잡아먹는다.


방금 전 바닥을 쓸고 닦았는데 돌아서면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다. 아깐 안 보였는데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왔지? 이번엔 돌돌이를 가져와 앞뒤로 박박 민다. 굽혔던 허리를 펴니 하얀색 TV 프레임 위로 솔솔솔 앉아 있는 먼지가 눈에 들어온다. 못 본 척하기로 한다. 대신 매끈한 바닥으로 시선을 돌려 찰나의 뿌듯함을 만끽하자. 잠시만. 아, 변기에 락스 뿌려둔 채 그냥 나왔네. 여름이라 곰팡이와 불필요하게 자주 인사한다. 욕실의 머리카락은 한층 더 혐오스럽다. 수영장의 소독약 냄새에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세상에서 제일 귀찮은 일이 남았다. 나에게 밥 먹이기. 누구를 챙길 필요도 없이 내가 먹을 음식만 준비하는 데도 왜 이렇게 지긋지긋한지 모르겠다. 대단한 요리를 하는 것도 아니다. 냉동한 밥을 데워 냉장고에 남은 각종 야채와 토마토를 얹고 엄마에게서 받은 양념장을 살짝 올린다. 이것은 비빔밥일까 포케일까. 맛있으면 됐지 뭐. 탄수화물이 돌자 몸이 소파를 찾는다. 그런데 뭘 했다고 2시지? 10분만 누워 있으려 했는데 30분이 지났다. 어지러운 부엌을 힐끗 쳐다보고 아이고, 소리를 내며 일어선다. 희망은 가사도우미 로봇에 있다.


행주의 물기를 짜고 털어 널어놓고 나니 3시가 다 되어간다. 아직 햇볕이 쨍쨍하지만 겨울이었으면 서서히 해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겠지. 모든 신경이 창조, 변화, 진보에 쏠린 때도 있었다. 그때의 나라면 오늘을 가장 쓸데없고 지루하고 비효율적인 하루로 평가했을 것이다. 유켈리스라는 예술가가 “매일의 유지 활동을 의식에 쏟아붓고 예술로서 전시할 것”이라 선언했다는데, 그렇다면 오늘 난 끝내주는 예술을 한 셈이다.



3.

날짜: 7월 24일

주제: 타자화


“악몽을 자주 꾸신다고요.”

“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해요 선생님.”

나는 말을 하며 몸서리를 쳤다. 곰팡이가 쓴 빵을 먹고 하마터면 영영 목소리를 잃을 뻔했으니까.


“무슨 꿈을 그렇게 꾸시는데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 반복되는 내용만 요약해서 전달하기로 했다.

“그놈들을 신나게 쪼아대는 거죠. 제가 당한 만큼 그대로 갚아주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쪼아도 그놈들은 고통스러워하지 않아요. 오히려 가소로운 듯이 쳐다보는데, 그게 어찌나 화가 나는지! 너무 화가 나서 자다가도 날개를 퍼드득 거린다니까요!!”


선생은 차트 너머로 빤히 나를 쳐다봤다. 난 저 눈빛을 안다. 무수히 봐 왔던 눈빛이다.

네가 그래봤자 바뀌는 건 없다고.


“그, 호모 사피엔스를 향한 분노 폭발이 그 사건 이후로 생겼나요? 아니면 그전부터 있었나요?”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을 시작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저희는 아주 유서 깊은, 뼈대 있는 종이잖아요. 현생 조류는 모두 공룡의 후손이에요. 중생대부터 역사가 시작된다고요. 무려 2억 5200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죠!! 하지만..”

너무 흥분한 나머지 깃털이 빠지도록 양 날개를 퍼드득 거렸다.


“환자분, 진정하시고요. 여기서 분노 발작을 일으키면 곤란합니다. 자, 심호흡 좀 하세요.”

나는 길게 뽑았던 고개를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시절 조상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을 힘껏 내밀고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진정이 되셨으면 이어서 말씀해 보세요.”

“선생님, 그것들은 기껏해야 30만 년 전에 나타났어요. 저희는 2억 5200만 년 전이고요. 이 시간의 차이가 느껴지세요? 근데 보세요 저들의 행동을. 곰팡이가 쓴 빵으로 교묘하게 덫을 놓는다니까요. 애초에 먹을거리가 부족하게 된 것도 저들 때문인데 지금은 아예 대놓고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있어요. 지들 멋대로 평화의 상징이라 이름 붙여 놓고는 이젠 유해종이래요 우리가. 이게 말이 됩니까 선생님?! 저는요,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우리의 혈관에는 공룡의 DNA가 흐른다니까요. 단지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에요.”


선생은 한참을 듣기만 하더니 내 차트에 뭔가 휘갈겨 썼다.

“오늘 진료는 여기까지 하죠. 약을 하나 처방해 드릴 테니 받아 가세요.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실 겁니다.”




3주 간 각기 다른 텍스트를 읽고 간단하게 서로 의견을 나눈 후 30분 정도 글을 썼다. 즉흥적 글쓰기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내가 준비한 텍스트로 발제도 해봤다. 충분히 한 여름밤의 낭만을 즐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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