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패션 알려주는 남자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매료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 매료될까요?
미학적인 부분으로 접근한다면, 우리는 [숭고]한 것에 자주 매료가 됩니다.
그렇담 미학적 숭고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미학적 숭고는 거대한 것을 의미합니다.
건축학을 전공하신 분들은 아마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거대하고 웅장해서 우리가 압도되는 것을 말하죠.
이는 건축물이 될 수도 있고 자연이 될 수도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에베레스트 앞에 서서 바라보는 것을 가정해보겠습니다.
우리는 거대하고 웅장한 에베레스트 앞에 압도가 되고 그 앞에 경외감과 두려움 그리고 동시에 아름다움을 한 번에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미학에서 말하는 숭고입니다.
자연뿐 아니라 건축에서도 우리는 이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있겠네요.
저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앞에 섰을 때, 안에 섰을 때 전부, [숭고]라는 개념을 온 몸으로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거대함에는 할 말을 잃게 됐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해 시학에서 “아름다운 것은 생물이든,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물이든 간에, 그 여러부분의 베일에 있어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크기(megathos)와 질서(Taxis) 속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패션에서는 미학에서 이야기하는 숭고를 느낄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패션에서의 의복은 상대적인 물리적 크기가 너무 작거든요.
물론 샤넬의 칼 라거펠트는 그랑 팔레에서 이루어지는 쇼에서 숭고를 보여주려 실내 디자인을 거대하게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리에서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 미학에서의 숭고를 가져왔을까요?
저는 앞서 “패션엔 숭고가 없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건물과 자연과 같이 물리적인 측면이 아닌 [거대한]이라는 추상적인 개념만 빼온다면 패션에도 숭고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거대한 것은 패션에서 무엇일지 고민해본다면 아무래도 [브랜드] [디자이너]의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맹목적인 믿음에 대한 위험성]이란 글로 따로 적으려 했지만 이야기의 흐름상 여기서 다루겠습니다.
우리는 거대 브랜드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샤넬, 발렌시아가, 구찌, 루이비통, 고야드 등등 많은 브랜드가 그 예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브랜드들은 전세계적으로 매우 크게 성행중이고 우리의 마음속에 [명품]이라는 단어로 크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는 어떤 말이냐면, 만약 동대문에서 이름 모를 회사의 옷을 산다고 칩시다.
일명 보세를 말씀드립니다.
보세의 옷과 명품의 옷을 같이 두고 비교를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명품의 옷이 더욱 우수하다고 판단을 내릴겁니다.
제가 말하는 패션에서의 미학적 숭고는 브랜드나 디자이너가 가진 거대하고 맹목적 믿음을 주는 힘입니다.
우리는 보세와 명품이 같은 제품이라고 하더라도 상표를 떼지 않는 이상 상표가 있는 명품에 더욱 높은 점수를 주게 되고 보세의 경우 카피제품, 가짜라고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경우가 다반수 입니다.
절대 같은 제품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죠.
이는 우리가 패션이라는 범주안에 있는 것에 매료될 수 있는 것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맹목적 믿음에서 오는 매료는 위험성을 동반합니다.
맹목적인 믿음은 우리의 시야를 가둡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매료되어 그 세계로 빠지게 된다면 우리의 시야는 너무나도 편협적으로 작용합니다.
보고싶은 것만 보게 되고 그것은 종교화되기도 합니다.
다른 것들은 전부 ‘잘못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죠.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이 잘못되더라도 잘못됐다고 판단할 수 없는 판단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브랜드의 예로 들자면, 시장과 개인이 광분하게 되는 어떤 브랜드가 생겼다고 가정합시다.
이 브랜드는 엄청난 매출을 올리며 성장할테고, 몇년 후 브랜드는 더욱 많은 이득을 위해 원단의 퀄리티를 낮추고 생산라인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여태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추정)
물론 가격은 더 높아지고요.
이러면 소비자들은 오히려 더욱 많은 재화를 투자하며 좋지 않은 물건을 구매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비자의 눈은 이미 멀었기 때문에 계속된 구매를 이어나갈 것이고, 시장이 변하지 않는 이상 이는 지속될 것 입니다.
맹목적 믿음이 창궐하고 이에대한 위험성이 도출되는 순간입니다.
숭고의 다른 의미의 숭고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우리는 이제 조금 더 미시적인 세계로 들어와서 의복을 봐야합니다.
의복 자체의 미(美)에 대한 매료입니다.
의복 자체의 미, 이것은 [디자인]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전부 다른 미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의복을 ‘아름답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모두가 다른 것이죠.
이는 제 글 중 [옷의 본질]을 보시면 다양성이라는 개념을 찾으실 수 있을 텐데, 이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디자인이라는 것에 매료되어 각자가 좋아하는 브랜드나 디자이너를 갖게 됩니다.
시장을 선도하는 브랜드나 디자이너가 아니라면, 이들이 만든 유행을 따라가게 되죠.
유행이란 그 시절의 미적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유행은 정말 빠르게 변하니 우리의 미적 기준의 변화가 얼마나 빠른지 가늠이 가실겁니다.
이러한 유행에 우리는 매료되어 의복을 구매하고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물질적인 것에 집중을 했습니다.
그리고 표면에 집중을 했습니다.
이는 건축에서 이야기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개념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표면]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표면논쟁이 있기도 했죠.
이를 가장 비판하는 인물은 Kenneth Frampton입니다.
Kenneth Frampton은 지금까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Kenneth Frampton이 이야기하는 뒤도 모르고 표면에만 집중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죠.
이는 80년대 베니스 비엔날레를 향해 뱉은 Kenneth Frampton의 비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린 인문학적인 것에 조금은 집중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앞에 조금 이질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제가 매료되는 부분은 이곳이거든요.
우리는 이것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의복을 즐기는 행위에 대한 나의 선택은 의복 그 자체의 물질적 존재에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독일의 철학자들은 “물질에서 거슬러 올라가 정신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라는 이야가 들을 했습니다.
이는 미학을 이야기하는 철학자들이 하던 이야기들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대표적으로 칸트의 경우에는 “정신과 물질을 이어주는 것이 미학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신과 물질의 높낮이 배치가 다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가치는 물건에 있지 않습니다.
오롯이 인간에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며, 결국엔 어떤 사람이다.’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인식론]과 [실존주의]를 조금 가져와야 될 것 같습니다.
인식론의 맹점은 존재의 인식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이 되겠지만, 우리는 ‘존재’에 대하여 ‘인식’ 할 수 있습니다.
존재에 대해 ‘관찰’이 아닌 ‘인식’입니다.
좀 더 본질적으로 이해를 하려면 어떤 것의 존재를 외부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내부에서 판단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하며 나를 [존재자]로 인식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칸트의 인식론에 따르면, “물질 자체는 알 수 없고 내 머릿속 표상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 하지만, 실존주의자들은 이를 타파합니다.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존재란 공간을 점유하며 시간성를 가지는 존재”라고 반박합니다.
[실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죠.
그럼 우리는 존재자란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물도 [존재]하는데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하나요?”라는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존재에 고민을 하지만 사물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물들은 저마다의 ‘분위기’를 내뿜으며 ‘본질’을 갖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사물은 그 스스로가 '분위기(공기)'를 만들어내는 '존재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앞선 말들을 전부 머릿속에 정리한 뒤, 나를 존재자로 인식하고 사물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했다면, 이제 우린 [존재자]를 [존재자 + 의복]으로 개념을 확장해야 할 순간이 온 것 같습니다.
자신을 존재자로 인식을 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인지 인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물은 저마다 분위기를 내뿜고 있으니 자신이 인식하는 존재자의 개념에 맞는 분위기의 사물을 합치면 된다는 것입니다.
존재자의 확장의 개념이죠.
그렇기에 저는 사물이 아닌 인간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앞에 이야기를 했습니다.
존재자로 인식하는 개념에 부합되는 분위기를 내뿜는 의복에 우리는 매료될 것입니다.
분위기의 이야기를 조금 더 깊게 해보자면, 앞서 제가 이야기한 브랜드와 디자이너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역사를 찾을 수도 있고 유산(Legacy)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 분위기는 과거부터 사물이 가진 본질 그 자체로 현재까지 이어져 존재하는 것이 될테고 유산은 개인의 집안에서 내려져 오는 어떤 것으로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를 현재의 본인의 존재가 즐길 수 있는 것이죠.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무언가는 저를 항상 설레게 합니다.
저는 그것에 매료되었구요.
매료에 대해 설명하려니 너무나 어려운 개념들을 가지고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사진도 적고 특정 브랜드의 사진을 넣으면 편협된 시각을 가지실 수 있을 것 같아 [맹목적 믿음]을 이야기할 땐 사진도 넣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글을 읽고 어떤 생각이 들고 어떤 의견이 있으신가요?
사실 이런 글이 인기가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지만, 문자의 시대를 지나 음성(영상)의 시대가 도래한 순간 인문학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에 제가 생각하는 인문학과 의복 안에서의 철학에 대해 적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고민을 같이 하시고 토론을 나눠봤으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 목표중 하나가 살롱을 만들어 밤새 이러한 이야기를 나누며 떠드는 것이죠.
더 글을 적으면 제 잡설이 길어질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글을 줄이고 다음 글에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7APR2022
* 이 글 등 패션 알려주는 남자로 적히는 모든 글의 저작권 및 아이디어는 패션 알려주는 남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04SEP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