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패션 알려주는 남자입니다.
오늘은 패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합니다.
저의 [옷의 본질] [클래식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에 이은 그 다음 글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하기에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저는 옷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명품도 좋아한다면 좋아하죠.
로로 피아나나 브루넬로 쿠치넬리, 막스 마라와 같은 우아한 브랜드들은 언제봐도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하지만 현재 세상에선 우아한 옷을 보는 것이 정말 힘듭니다.
무언가들이 다 망쳐 놓았기 때문이죠.
사실 2010년 초중반만해도 패션쇼를 보는 것은 정말 재밌는 일이었습니다.
프라다의 파스텔톤 골프시즌은 정말 아름다웠고 버버리 프로섬은 항상 우아함과 패션의 사이를 줄타며 아름다움을 알려줬습니다.
그리고 유밋 베넌과 같은 신인의 낚시꾼 시즌같은 것은 정말 놀랍기도 하였죠. 물론 생로랑에서 날아다니던 에디 슬리먼도 대단했습니다.
특히 그의 파인트리는 완벽하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죠.
더하여 톰브라운의 올블랙 시즌인 나이트메어도 정말 대단했고 항상 컨셉을 잡아 진행하던 그의 몽클레르 감므블루도 항상 재밌었습니다.
또한 제냐의 모든 시즌은 정말 남성을 위한 모든 것이었고 에르메스도 리조트룩의 최고를 찍곤 했습니다.
티시가 이끄는 지방시의 로트와일러나 구관조는 정말 지금 봐도 세련됐고 존 갈리아노의 찰리 채플린과 그 다음시즌인 북방계의 그 마초적인 느낌과 이국적인 느낌은 아직까지도 찾아볼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생각해보니 폴스미스도 정말 대단했습니다. 뭐 디스퀘어드, 릭오웬스 등등 모든 디자이너들이 대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저는 '그 시절' 정말 많은 쇼를 보면서 공부를 할 수 있었죠.
하지만 저는 이제 패션쇼를 보지 않습니다.
현재에 패션에서 저는 그 어떤 우아함도 찾을 수 없고 문화의 존중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패션은 이제 돈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디자이너보다 돈이 우선이 되는 세상이 되었죠.
그리고 속된 말로 수많은 '장난질'이 들어갑니다.
저는 이 시작을 루이비통과 슈프림의 콜라보레이션이라고 보고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인스타그램에 이에 대해 적은 글이 있습니다.
저는 이 콜라보 소식을 듣고 킴존스가 아닌 루이비통 수뇌부가 진행한 일이라고 추측하였고 얼마 뒤 BOF에서 이게 사실임을 증명해주었죠.
더 나아가 왜 이것이 망조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냐면, 이전의 디자이너들은 우리에게 문화라는 것을 많이 보여줬습니다.
이것이 좋고 나쁨을 떠나 컨셉이라는 것이 확실했죠.
따라서 이는 공부가 되었고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철학을 통해 문화를 관철하여 재해석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를 저는 철학이라 칭하겠습니다.
철학은 언제나 그렇듯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이는 브랜드가 가진 이름보다 더 강한 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루이비통과 슈프림의 콜라보 이후에는 직관이 훨씬 중요한 가치로 떠올랐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직관에 쾌락이 들어갔다는 것이겠죠.
명품의 구매행동을 보면 ‘라벨’이 주는 만족감이 있습니다.
루이비통과 슈프림은 이것을 최상위로 끌어올린 무언가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라벨’이라는 개념으로 끝날 일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기사제목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인간구찌’ ‘ 인간생로랑’ ‘구찌룩’ ‘생로랑룩’ 등등 브랜드가 보여주는 룩 자체가 하나의 ‘라벨’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소비를 촉진시키고 브랜드의 통일성을 주어 연쇄적인 구매행동을 촉진시킬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시작은 톰브라운이라고 봐야겠죠. 톰브라운은 머리부터 신발까지 전부 톰브라운이어야지 완성이 되니깐요.
각설하고 이는 상당히 위험합니다.
여태까지 소비자들에게 주어지던 자율성과 새로운 디자이너들의 자율성을 없애는 일입니다.
일 예로 에디 슬리먼과 전성기를 이룬 생로랑은 그가 떠난 후에도 그의 디자인을 따라하며 그것이 자신인 것 마냥 아직도 그를 따라하는 디자인을 찍어내기 급급하죠.
더 나아가 이 사태가 계속 된다면 소비자들은 브랜드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브랜드는 퀄리티에 아주 큰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지고 가격 또한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렇기에 지금 나오는 브랜드들의 옷은 원단이 정말 별로고 가격은 말도 안됩니다.
저는 2010년 초 톰브라운의 가디건을 5~60만원 정도에 사고 제 지인은 100%캐시미어 롱코트를 400만원에 구입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지금 생각할 수도 없는 가격이고 원단도 가격대비 용납이 안될 정도로 나빠졌습니다.
지인의 코트의 경우 2010년도 중말 800만원이 되었고 원단은 더 나빠졌습니다.
하지만 톰브라운의 추종자들은 살 수 밖에 없는 소비 체인을 만들었죠.
예를 톰브라운으로 든 것 뿐이지 모든 브랜드가 똑같습니다.
이 쾌락은 정말 너무할 정도로 패션을 망쳐놨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개인의 생각입니다.
직관적으로 무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우아함이었음 좋겠고 젠틀함이면 좋겠습니다.
저는 현재 발렌시아가 풀셋을 입고 절대 장례식장, 상견례, 결혼식 그리고 교회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패션계는 현재 정치적인 면모가 너무 많이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술은 그럴 권리가 있고 그것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것을 해야하고 사회적으로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기업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따라야 이윤이 나니 선택을 하는 것이 당연하죠.
이는 디자이너의 창의성을 죽이고, 창의성이 뛰어나고 좋은 가치를 추구하는 디자이너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것 또한 의미하죠.
우리는 이미 수많은 천재를 잃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꼽자면 지금의 패션은 '악(惡)'해보입니다.
이건 제 느낌이기 때문에 어떻게 설명드려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의 패션을 봤을 때 그것이 선하여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 악하기 때문에 머리가 아픕니다.
디자인 자체가 쾌락적이어서 그런 것일까요? 이건 너무나 개인적인 것이지만 적어놔야 나중에 제가 '그땐 그랬지'라고 곱씹거나 혹은 생각이 바뀌어 반성하거나 하기 위해 적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옷을 사랑하는 이유는 오랫동안 인류가 의복안에서 장인정신 하나로 지켜온 ‘가치’라는 것과 인류가 쌓아온 '역사'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가치와 역사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옷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가치와 역사는 충분한 의미가 있고 그 어떤 쾌락도 정치색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결정 그 자체입니다.
저는 이름 모를 누군가들이 손으로, 철학으로 조용히 이어가고 있는 이것을 인류학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저는 이제 패션을 혐오하고 인류학을 사랑합니다.
패션을 사랑하고 좋아하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100%의 확신으로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아하거나 젠틀하지 못한 현재에 패션에서만 그렇죠. 맨 앞에 말했듯 우아함과 젠틀함을 잇는 브랜드들은 아직도 사랑합니다.)
글을 적으며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선생님이나 위베르 드 지방시 선생님과 같은 우아함을 쫓던 그런 위대한 디자이너들이 그리워지는 그런 날입니다.
03DEC2021
* 이 글 등 패션 알려주는 남자로 적히는 모든 글의 저작권 및 아이디어는 패션 알려주는 남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01SEP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