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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ux Apr 21. 2023

그 선배, 저 엄청 괴롭혔어요

그랬니? 선생님은 전혀 몰랐다

 끔찍한 학교폭력을 당했던 피해자가 가해자 집단을 상대로 처절하게 복수하는 내용의 드라마들이 최근 들어 준수한 시청률을 보이고 있고, 가해자에 대한 정당한 처벌 방안 및 학교폭력 예방에 관한 각계의 관심이 아주 높은 상황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들이 걸핏하면 학교에서 학교폭력 예방 교육을 받고 와서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저에게 해줍니다. 학급 부회장에게 폭언을 들은 친구들이 화가 나서 칠판에 부회장에 대한 비난글을 한가득 써놓았는데, 아들이 깜짝 놀라서 ‘이러면 너네도 학교폭력 가해자가 될 수 있으니 지우라’고 알려주었고 친구들도 겁이 나서 칠판을 싹 지웠다고 합니다.


 나 잘했지? 라고 으쓱하며 묻는 아들의 말에, 응 잘했어, 네가 친구들을 구했네, 라고 답해주긴 했지만 저는 문득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습니다. 폭언을 먼저 내뱉고 자주 하는 학생은 어느 학교에든 있을 겁니다. 학교에서는 그 학생을 비난하는 행위도 언어폭력인 건 매한가지이니, 설사 비난이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폭력이라는 단어를 등가적으로 보았을 때, 당연히 이쪽이든 저쪽이든 폭력은 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대개 폭력을 먼저 혹은 자주 행사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기 마련인데, 그런 사람을 우리는 그냥 참아주어야 하는 걸까요? 만약 참아주지 않는다면, 어떤 방식으로 그런 사람을 막을 수 있을까요? 아니, 막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요?


 초등학생 때 저는 교내 행사에서 사회자 역할을 하고 싶었는데, 더 키 크고 예뻤던 친구가 저를 제치고 그 역할을 따냈습니다. 물론 제가 보기에도 행사 당일 한복을 차려입고 또랑또랑하게 사회를 보는 그 친구가, 저보다도 무대에 훨씬 잘 어울려 보였습니다. 제가 그때의 아쉬움을 간직한 채로 중학생이 된 어느 날, 신입 방송부원을 모집하는 공고가 교내에 붙었습니다. 만약 제가 방송부원이 되면, 제가 맡은 날짜에 저의 목소리로 제가 쓴 방송 멘트가 교내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엔 방송부원이 되려면 일정 기준 이상의 학업성적을 갖추어야 했고, 저는 제 성적으로 방송부원은 합격하겠다 싶어져 어머니께 냅다 모집 신청서를 들이밀며 동의 서명을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뭔가 예상한 바가 있으셨던지 제게 ‘정말 후회 안 할 자신이 있느냐’고 물으셨고,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방송부를 그만두지 않겠다’며 서명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방송부원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우리가 요즘에는 학교폭력이라고 부르는, 정말 온갖 종류의 괴롭힘에 시달렸습니다. 맞지 않았다 뿐이지 매일 혼났고, 아침 7시까지 등교해서 방송실 청소를 시작했고, 선배들에게 간식도 사다 바치고, 복도에서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인사를 했습니다. 종이 치는 시간을 못 맞췄다거나 방송 중인데 소음을 낸다거나 하는, 방송과 관련된 실수로 혼나는 건 이해할 수 있었지만 독후감을 매일 써오지 않아서, 친구들과 방송실에서 웃으면서 청소해서 혼나는 등의 경우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중 저를 전담하는 선배는 화가 나면 방송실 서랍과 쓰레기통을 다 꺼내서 뒤집어 엎고, 제가 아침부터 열심히 먼지를 닦아놓은 LP판을 바닥에 와르르 쏟고 나서 다시 정리하고 집에 가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참았습니다. 하필 제가 제 입으로 어머니께 방송부를 그만두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던 탓이었습니다. 다른 방송반 친구들은 그나마 상냥한 선배들을 만나 덜 혼나는데, 제 선배는 얄짤 없었습니다. 개학을 하면, 방학 동안 매일 쓰지 않았으니 벌이라며 제게 독후감 숙제를 추가시켰습니다. 친구들 독후감 공책은 반 권이 채 안 채워져 있는데, 저만 쓴 독후감이 많고도 많아 100개를 넘어가서 공책 두 권을 붙여 사용했습니다. 저는 선배가 졸업할 때까지 버텨 마침내 제가 3학년이 되었고, 방송부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방송부에서 독후감 숙제를 없애겠다고 모든 방송부원이 있는 자리에서 선언했습니다.


 바로 그게 문제였습니다. 친구들은 지금 너만 착한 척 하냐며 저를 고깝게 보기 시작했고, 방송부 일을 대충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아나운서로 방송하는 날이나, 교장 선생님 훈화를 방송실에서 하는 날 등에는 은근슬쩍 방송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후배들도, 제 친구들 눈치를 보느라 그랬겠지만, 저를 돕지 못했습니다. 저는 방송 송출 기계를 조작하면서 음원도 틀고 혼자 방송을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 훈화 때에도 삼각대 놓고 비디오 카메라를 혼자 잡아 전교에 내보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해주었다고 해서 유달리 후배들이 고마워한 것도 아니고, 제가 누군가에게 칭찬받거나 표창을 받은 것도 아니지만 저는 그냥 그렇게 살았습니다. 


 저 또한 어리숙한 나이였으니 투철한 윤리 의식이 있어서 그랬을 리 만무한데, 왜 그렇게 살았을까 되짚어보면 ‘내꺼가 아니니까’ 그랬던 것 같습니다. 청소를 다 해놓은 서랍을 엎어놓는 행동은 제것이 아닙니다. 방송 멘트와 관계 없는 독후감 숙제를 매일 하라고 다그치는 행동은 제것이 아닙니다. 원래 저라는 사람이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인데, 선배가 그렇게 했다고 해서 어거지로 제가 선배처럼 행동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선배처럼 살려면 늘 마음 속에 화가 잔뜩 나 있어야 하고, 작은 일에도 날카롭게 반응하고, 후배들 앞에서 자기가 받은 연애편지 줄줄 읽어줄 만큼 허영심이 그득해야 하는데, 저는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에는 태업했던 친구들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들도 본인들이 받았던 부당한 처우가 억울했을 따름이지, 원래는 선배같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사실 그들이 처음부터 미워하던 사람은 선배이지 제가 아니었으니까요. 글쎄요. 지금의 시각으로 되짚어보면 저를 괴롭히는 선배는 물론이고 제 친구들도 학교폭력 가해자였고, 후배들이나 담당 선생님은 전부 방관자였습니다. 그들이 제게 행한 학교폭력에 대해 저는 전혀 사과받은 바도 없고, 제가 어디에 하소연한 적도 없고, 그들은 처벌 비슷한 걸 아무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분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분합니다. 원망스럽지 않냐고 묻는다면, 원망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들을 어떻게 처벌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모르겠습니다.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그야 받겠지만, 처벌은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저는 그저 저러한 상황이나 인간들과 앞으로도 엮이기 싫은 것일 뿐, 처벌한다면 과연 그들이 제가 원하는 반성을 할 지 의문입니다.


 인터넷 뉴스를 읽다 보면 댓글에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라는 표현이 심심찮게 보이는데, 저는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인류애가 넘쳐나서, 혹은 폭력은 절대 하면 안 되는 것이라서, 뭐 이런 종류의 고상한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정신을 못 차릴 인간은 맞아도 못 차릴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제 추측으로는, 철없는 인간은 폭력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 나쁜 쪽으로 비뚤어질 듯합니다. 폭력으로 인해 망가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말입니다.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따위의 핑계를 대면서 전혀 관계없는 사람을 살해하는 범죄자들의 행각을 보면 더욱 이런 생각이 강해집니다. 개인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철저하게 윤리 의식을 확립해야만 폭력을 예방할 수 있을 뿐, 이게 보장되지 않는 한 폭력은 계속 이루어질 겁니다. 작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국가청렴도는 100점 만점에 63점이며, OECD 38개국 중에서는 22위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는 아직 멀었습니다.  


 피싱 같은 사기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면 안 된다’라는, 어린이집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아주 기본적인 교육이 모두에게 체화되지 않는 한 우리는 주변에서 활개치는 사기범들을 목도하게 될 겁니다. “나한테 사기 친 사람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좀 미안하겠지?” 보이스피싱을 당하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산책 중에 제가 이렇게 말하자 신랑이 코웃음을 치면서 답을 했습니다. “미안할 사람들이면 너한테 그랬을 리 없어. 아예 그런 추측을 하질 마. 너랑 종류가 다른 사람들이야.” 하긴 그렇겠지요. 남을 해치는 이들에겐 죄의식이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죄의식 자체가 없으니, 그런 이들을 계도한답시고 처벌이나 폭력을 행사해보았자 제가 원하는 수준의 도덕성을 갖게 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고 제가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그들을 직접 혹은 누군가를 시켜 단죄할 수도 없습니다. 현실에서 이루어내기 어려운 상황이니, 드라마로 대리만족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최근 경찰청 고위직으로 임명된 검찰 출신 변호사의 아들이 동급생을 상대로 1년 가까이 폭언을 하고 집단 따돌림을 하며 괴롭힘을 이어갔다는 사실이 밝혀져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가해자는 ‘장난처럼 한 말을 학교폭력으로 몰아간다’며, 언어로 자행하는 폭력은 폭력이 아닌 것마냥 망언을 일삼았고 보란 듯이 명문대에 진학했습니다. 이 사건은 사회적 위치와 권력을 가진 자를 부모로 둔 가해자가 어떠한 방식으로 피해자를 고통에 빠뜨리며,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신상필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여서 정말 많은 지탄을 받았습니다.  


 만약 제 아들이 이런 피해자 입장이라면 저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저는 기본적으로 아들을 도덕적인 아이로 자라게 하고 싶습니다. 누군가 손쉽게 남들을 등쳐먹는 걸 보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타인을 괴롭게 하는 걸 보았을 때 그에 동조하지 않는 아이로 자라길 바랍니다. 그런 저의 교육 방침이 설령 아이를 경제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뛰어난 성인으로 만들지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남을 짓밟는 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다, 그건 내꺼가 아니다라는 마음을 강렬하게 내재하고 있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아들이 위 사건의 피해자처럼 정서불안을 앓고,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거나 하면 저 또한 참을 수 없을 겁니다. 누구 말마따나 ‘차라리 내 새끼 원수 갚고 내가 감옥에 들어갈’ 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미 학창 시절처럼 부당한 상황을 잘 견뎌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참으면 참을수록 등신이 되는 혹독한 세상 경험으로, 과거와 달리 마음 속에 울분이 많이 쌓인 상태입니다. 예전이었다면 아들이 어디서 맞고 오는 경우 ‘넌 맞았어도 남들을 때리면 안 돼. 네가 참아,’라고 말했을 법도 한데, 지금으로선 ‘장난하냐? 가서 더 패주고 와. 너 복싱 배울래?’라고 할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해버린 저의 모습이, 저는 참 안타깝고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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