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짜면은 좋아합니다만
신랑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다가, 현관문 밖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저는 아들과 잽싸게 몸을 숨깁니다. 이불 속에 숨을 때도 있고 빨래 건조대 쪽에 숨을 때도 있는데, 이번에는 시간이 없어 안방 책상 아래에 숨었습니다. “나 왔어~”라고 신랑이 인사하며 집으로 들어서도 저와 아들은 속으로만 웃음을 삼킬 뿐 아무 대답을 안 해줍니다. 신랑이 매일 반복되는 상황에 질려 한숨을 쉬면서도 여기저기 우리를 찾아나섭니다. 신랑이 우리를 찾아주면 저와 아들이 킬킬거리면서 책상 아래에서 기어나옵니다.
그리고 또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신랑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냐고 물어보고 전철역까지 마중을 나갑니다. 벚꽃이 꽃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꽃잎이 다 떨어질 때까지는 정말 매일 나갔습니다. 어떤 날에는 저 역시 벚꽃을 보면서 출근하고 퇴근했기에 다시 나가기가 귀찮아서 안 나가려고 했지만, 그날은 반대로 신랑이 꽃 지기 전에 많이 봐야 한다며 저를 불러냈습니다. 저는 그러면 투덜거리면서도 외투를 걸쳐 입고 나갑니다. 그렇게 거의 매일 산책을 하고, 조잘조잘 수다를 떨고, 아들을 재우고 나면 또 자기 직전까지 서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런 저희의 모습이 남들 눈에는 신기하고 재미있나 봅니다. 어젯밤 신랑이 자기 전에, 본인이 직장 동료들과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습니다. 동료가 신랑더러 “차장님 부부도 싸워요?”라고 묻기에, “그럼 당연히 싸우죠,”라고 대답하고, “에이 싸워봤자 조곤조곤 대화 나누는 수준일 거 같은데요,” 하기에, “무슨 말씀이세요 소리 빡빡 지르면서 싸우죠,”라고 대답해서 다들 막 웃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각 가정의 부부싸움 행태 조사는 끝내 그 부서의 모든 부부가 싸우면서 살더라는 결말로 마무리 지어졌다고 합니다. 사실 신랑네 부서 사람들은 대체로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을 가졌으며, 부부 사이가 좋은 편인데도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 자체는 최근 몇 년간 꾸준히 낮아졌지만, 이는 혼인 건수 자체가 줄어들어 함께 낮아진 것처럼 보일 뿐 작년 기준으로 따지면 두 쌍의 혼인한 부부 중 한 쌍이 헤어졌다고 합니다. 1980년에는 약 40만 쌍이 혼인하였는데, 2022년에는 약 19만 쌍이 혼인하였다고 통계에 잡힐 만큼 혼인 건수는 곤두박질 하였습니다. 결혼 자체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도 명확합니다. 아무리 다각도로 들여다보아도, 결혼은 남녀 모두에게 기이할 지경으로 비경제적이니까요. 헌데 결혼이 부부만의 결합이 아니라 가족 간의 결합이라고 여기는, ‘온갖 압박 속에서 결혼을 해야 하는’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힘들게 결혼을 해놓고도 끝내 절반 가량이 이혼을 선택하는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요?
이혼이 대세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심심찮게 이혼 경험담을 듣고 읽습니다. 제 주변에도, 신랑 주변에도 이혼한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어느 미혼의 인기 작가가, 이혼을 소재로 한 전자책들의 조회수보다 자신의 전자책 조회수가 훨씬 적은 걸 보면서 ‘아 나도 진짜 이혼이라도 해야 조회수가 늘어날까’ 한탄을 했다는 일화를 듣고 피식 웃은 적도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이혼이 이제 사회 전반적으로 흔한 일이고, 이혼 경험자도 늘어났고, 이혼을 염두에 두고 있거나 이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대변하는 일화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보이스피싱 탓에 마음에도 없는 이혼을 할 뻔하긴 했지만, 저는 애초부터 이혼할 마음이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 이혼하지 않게 되어 참 다행입니다. 이혼한 이들의 사유 1위는 성격 차이이고, 2위는 경제적 문제라는데, 저는 2위에 해당하는 사안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그나마 1위에 해당하는 사안은 딱히 갖고 있지 않아서인가 봅니다. 그렇다고 신랑과 성격 차이가 없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저와 신랑은 성격이 아주 다릅니다. 그런데 이혼까지 가게 되는 성격 차이라는 사유는, 외향적인가 내향적인가, 혹은 꼼꼼한가 덜렁거리는가, 이런 종류의 성격을 일컫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저는, ‘부부의 가치관과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다른가’를, 통칭 이혼까지 가게 되는 성격 차이라고 일컫는다 봅니다.
어떤 이혼 전문 변호사가 ‘반반 결혼’에 대해 설명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반반 결혼이란, 결혼에 드는 비용을 맞벌이하는 부부가 공동으로 일정 부분 통장에 넣고 각자 나머지 돈을 관리하는 형태로 결혼을 하는 거라고 합니다. 반반 결혼은 산술적으로도, 관념적으로도 평등해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결혼식이라는 행사 이후 결혼 생활을 하다보면 절대 결혼 생활은 산술적으로도, 관념적으로도 평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평등이라는 개념 자체가 통하지 않는 생활을 하면서, 기업에서 회계 처리하는 것처럼 비용과 노동 시간을 정리하면 당연히 계획과 맞지 않는 부분이 생기고, 그러면 부부 간 갈등이 벌어져 이혼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굉장히 흥미를 가졌던 부분은, 처가에 가는 경우 남편이 아내에게 ‘처가에 가는데 주유비를 왜 내가 내냐, 네가 내야지’라고 하여 갈등이 생겼다는 사례였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사례 속 남편이 괘씸하기도 하지만, 저러한 종류의 사고를 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합니다. 거꾸로 아내가 ‘시가에 가는데 주유비를 왜 내가 내냐, 네가 내야지’라는 말을 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주유비 같은 사소한 걸로 다툼이 벌어지는 관계라면, 육아 같은 폭탄 돌리는 수준의 과업을 하게 되는 상황에선 부부가 갈라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일단 폭탄은 쪼개어 들 수가 없고, 한 명이 오롯이 들고 남은 사람들이 그걸 안 들든지, 잠깐 대신 들든지, 제법 오래 들어주든지 해야 하니까요. 겨우 아들 하나 키우면서, 그 꼬맹이 녀석 하나 때문에 저와 제 신랑, 제 어머니까지 셋 모두 손목이 나갔던 경험을 떠올려보니 더욱 기가 막혔습니다.
곧 결혼할 제 친구가 결혼 선배로서 조언을 해달라고 신랑에게 요청했을 때, 신랑이 아련한 눈빛으로 먼 곳을 보면서 “자기가 손해 본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기려고 하지 말고...”라고 말을 꺼냈고 모두 왁자하게 웃었던 일이 있습니다. 친구들은 제가 피싱을 당해 거액의 빚을 진 걸 알고 있던 상황이어서, 저 말이 농담이지만 대단히 진담 같았기에 웃은 겁니다. 아니, 진담이 맞습니다. 신랑은 결혼 생활의 핵심을 잘 알고 있는 겁니다. 상대방에 의해 자신이 손해 본다고 생각하거나, 상대방을 이기려는 사람은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제 탓에 가정 경제가 많이 흔들리긴 했지만, 그 이전에 저라는 사람이 신랑을 계산적으로 대하거나, 이겨먹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랑이 저를 무시하거나 하대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반려자로서 대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러한 면에서 제가 스스로에게 떳떳한 덕분에, 저는 아직도 자존감 있게 삶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신랑이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면, 저는 신랑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마찬가지로 고통과 눈물의 세월을 건너올 테지만, 또 역시 마찬가지로 신랑과 이혼하지 않고 지금처럼 지낼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저나 신랑이나 처가의 일이든 시가의 일이든 자기 일처럼 했고, 서로 비용을 먼저 지불하겠다고 나섰고, 개인적으로 속상한 부분이 있어도 어르신들 앞에서는 그런 걸 드러내지 않았고, 본인 가족이 아닌 상대의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어느 한 쪽이 일을 더 떠맡은 경우에는 평등을 따지기보다는 고마워하고 미안해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신랑은, 남녀 통틀어 여태까지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저를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터졌든 간에, 제 인생 근 20년 만에 어렵사리 만난 제일 친한 친구를 차마 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지금껏 저는, 준 만큼 받으려고 하고, 받은 만큼 주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멀리했습니다. 그런 행위 자체가 ‘너는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는 느낌이어서, 선 긋는 사람에게 제가 굳이 제 시간과 감정을 쏟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반대로 십수 년이 지나도 계속 보고 싶고, 어제 보았는데도 또 보고 싶은 사람들은 제가 뭘 주면 더 주려고 하고, 제가 되갚으면 또 뭘 더 해주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혼 생활도 넓은 의미에서 인간관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신랑을 위해 10을 하면, 신랑이 다른 방면으로 제게 30을 하고, 제가 다시 어떤 걸 50만큼 하면, 신랑은 80만큼 가져다줍니다. 빨래 하고 널기나, 아들 숙제 봐주기나, 냉장고 정리같은 건 신랑은 치명적으로 못하지만, 저의 말을 들어주기나, 같은 이슈에 관심을 가져주기나,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이해하기에는 신랑이 어느 누구보다 탁월합니다.
이혼한 사람이 늘어남과 동시에, 연애하고 싶은 돌싱이 늘어나는 현상도 당연지사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알아주는 짝을 갖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기존 배우자와 헤어져 아무리 괜찮은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반반 결혼’ 또는 ‘반반 연애’의 입장을 고수하는 분이라면, 저는 그분이 비즈니스 파트너라면 몰라도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짝이 되기란 대단히 힘들 거라고 예상합니다. 사람의 마음씀이나 애정은 자로 잰 것처럼 완벽히 반반일 수가 없으니까요. 실질적으로 내가 남을 사랑하는 것만큼 남이 나를 사랑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남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남을 더 사랑할 수도 있고, 또 그보다 남이 나를 더더욱 사랑할 수는 있을 겁니다. ‘베풀수록 행복은 커진다’는, 논리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문구가 희한하게 인간관계에서는 나름의 위력을 발휘하는 듯합니다.
오늘도 신랑이 퇴근하면, 저는 아들과 쪼르르 달려가 숨든지 해서 신랑을 곯릴 겁니다. 그리고 아들을 재우고 나서 신랑에게 ‘반반 결혼’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을 겁니다. 그럼 아마 신랑은 킥킥 웃으면서, 그래 네 말이 맞다, 무슨 반반이냐, 내가 너한테 더 잘하지, 뭐 이런 식으로 답하겠지요. 그럼 저는 또 황당해하며 아니다 무슨 소리냐, 내가 당신한테 더 잘하지, 하고, 둘이 이런 쓸데없는 걸 가지고 옥신각신 할 겁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늦으면, 됐다 뭔 반반이냐 자자, 하고 조명을 끄고 잠을 자겠지요. 저는 괜히 신나서 신랑 팔을 쓰윽쓰윽 만지고요. 저는 상상만 해도 자기 직전의 그 시간이, 그때 옆에 있는 제 신랑이,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