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은 아닙니다
16 Rejoice always,
17 pray continuously,
18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
- from Thessalonians 5:16-18, NIV
여지껏 저는 기독교와 멀찍이 떨어진 삶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확률이 아주 높지만 세계에서 가장 널리, 많이 팔린 책인 성경의 가치를 폄하하지는 않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취향과 다소 동떨어진 부분이 있을 뿐, 어떠한 책이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혔다는 사실 자체는 대단한 것이니까요.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저의 가족 중에도 기독교인이 없지만 우연히도 기독교인이 세운 학교들을 줄곧 다닌 덕분에 성경과 예배에 대한 지식은 조금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성경 구절 가운데 제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구절은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우리말로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번역된 구절입니다.
우리는 좋든 싫든 다양한 고난에 맞닥뜨리고, 기쁜 순간보다도 고통스러운 순간이 더 자주 찾아오는 게 우리네 삶이므로, 그런 순간들을 포함한 모든 상황에 감사를 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믿는 이들은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저처럼 종교적 신념이 따로 없는 사람에겐 범사에 감사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저의 처지가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하고, 절망스러워서, 감사의 마음은커녕 불평과 불만이 올라오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가 문득 범사에 감사하자는 마음을 갖게 된 계기는, 엉뚱하게도 아들을 키우면서 찾아왔습니다. 아동 성장의 자연스러운 단계라고는 하지만, 아들의 나이가 너댓 살 가량 되고 자아가 강해지면서 ‘안 돼,’ ‘싫어,’ 등 부정적인 단어를 자주 쓰기 시작하니 저는 점점 아들의 말을 듣기가 불편해졌습니다. 그러다 유치원에서 아들을 데리고 집에 걸어가던 어느 날, 다음 날까지 실내화를 준비해야 하니 문구점을 들르자는 저의 말에 아들이 “실내화는 선생님이 주셔야지 왜 내가 준비해?”라고 반응했고, 그러잖아도 아들의 머릿속에 감사의 개념이 너무 희박한 것 아닌가 의심을 하고 있던 저는 그날 작정하고 아들을 야단쳤습니다. 본인에게 필요한 건 본인이 챙겨야 하는 게 당연하고, 선생님은 너를 도와주시는 분이지 준비물을 일일이 사주시는 분이 아니라고요.
“너는 선생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너무 없어. 감사하는 마음을 좀 가져.” 헌데 이런 문장을 아들에게 내뱉으면서 저는 불현듯 ‘나 자신은 감사를 하고 있는가’란 물음을 스스로에게 해보았습니다. 실은 저의 마음 속에도 아들 주변의 다양한 분들에 대한 감사보다 불만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진 가장 큰 불만은, 제가 유난히 아들을 원했다거나 아들 아니면 안 된다고 다짐한 적도 없건만, 아들 엄마라는 이유로 아들 대신 제가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눈치를 보아야 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저와 신랑은 우리가 아들 부모가 될 거라는 걸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들이 싫어서 회피했다기보다는, 밑도끝도 없이 그저 귀여운 여자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는 상상을 했습니다. 양가 어르신들도 특정 성별에 대한 선호를 딱히 보이신 적은 없지만, 딸이면 귀엽겠다 그 정도로 언급하신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 뱃속에 든 아이의 성별이 남자라는 걸 들었을 때, 저와 신랑은 둘 다 하얗게 질려 멍하게 초음파 화면만 보고 있었습니다. 여보, 어떡하지? 그러게, 진짜 어떡하지? 저희는 둘이 이런 짧은 탄식조의 말들을, 근 한 달간 나누면서 현실과 타협했습니다. 좌우지간 저와 신랑은 아들 부모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었고, 그건 앞으로 우리가 맞이해야 했던 다채로운 차별과 편견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거치면서, 아들 엄마였던 탓에 아들과 함께 저도 모지리 취급받은 기억이 여럿입니다. 어린이집 선생님들 가운데 특히 딸만 키우셨던 어린이집 선생님께 들었던 잔소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끝도 없었습니다. 제 아들은 <조용히 인형처럼 놀기> 일단 실패, <의자에 오래 앉아있기> 실패, <수업할 때 집중하기>도 실패, 대신 <노래 부를 때 목청껏 소리 지르기>는 1등, 뭐 이런 식이었으니까요. 유치원 원장 선생님께서는 유치원 입소 초반부터 제게 ‘어머니께서 유아교육 전공자가 아니시니 잘 모르실텐데,’라는 문장을, 글로 쓰기에도 민망한 이 문장을 말로 하시면서 아들이란 종족을 유치원 규칙에 어떻게 맞추어 길들여야 하는지에 관해 일장연설을 하셨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저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선생님들에 대한 불만을 대놓고 말한 적은 없어도 “너 때문에 엄마가 자꾸 선생님들께 혼이 나잖아!”라고 아들에게 화풀이를 했던 것 같습니다.
아들 뿐 아니라 제게도 감사가 희박하다는 걸 깨달은 후, 저는 아들을 일방적으로 다그치는 것 대신 둘이 함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기회가 될 때마다 타인에 대한 칭찬을 하고, 감사를 표한 것이 인정되면 자기 이름 아래에 별 모양 스티커를 붙였습니다. 처음에는 아들이 칭찬 자체에 어색해서 이상한 문장을 만들어내고, 스티커 욕심 탓에 억지로 하는 게 너무 뻔한 감사 표현을 하기도 했지만, 점차 아들의 부정적인 단어들은 줄어들었습니다. 저도 칭찬과 감사 표현이 오글거려서 참 하기 어려웠는데, ‘이건 언제가 됐든 꼭 해야 하는 교육이니까 해야 한다’고 되뇌면서 아들만큼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저조차 키우기 힘든 제 아들을, 하루에 몇 시간씩 맡아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평소에 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아들이 유치원 학예발표회 때에는 선생님의 손짓에 따라 무대에서 노래도 율동도 하는 걸 보고, 선생님들의 능력이 경이롭다는 것 또한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아들이 유치원에 입학한 지 2년쯤 되자, 슬슬 심상치 않은 징후가 나타났습니다. 아들이 제게 “엄마, △△이는 왜 □□랑 놀지 말라고 해? 원래 다같이 친하게 지내야 하는 거 아냐?”라고 물었던 그 즈음부터였습니다. 유치원에서부터 갈라치기가 시작되다니 참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싸움은 곧 어른들 싸움으로 번졌고, 하루가 멀다하고 학부모들이 유치원에 민원을 넣었습니다. 반사 효과인지, 그동안 아무런 이의 없이 조용히 아들을 보낸 제게 갑자기 원장 선생님이 엄청 상냥해지셨습니다. 저를 아들 가진 죄인마냥 취급하실 때는 언제고, 느닷없이 제 아들의 칭찬을 줄줄 늘어놓으시는 그분을 뵈니 기쁘다기보다는 다소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민원에 시달리시기 전부터 그냥 상냥하셨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란 생각도 들었고요. 어쨌든 유아교육도 모르는 죄인이었던 저는, 2년 만에 천사같은 학부모가 되었고 그건 그간 아들과 함께 했던 감사 프로젝트 덕분이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본인의 자녀를 꾸중하거나 본인의 모습을 돌이켜 보기보다는, 다른 친구와 교사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부모가 적지 않은 듯합니다. 교사인 지인이, 누가 봐도 문제아인 자신의 아이가 아닌, 아이의 담임교사를 입이 부르트도록 욕하는 걸 보면서 차마 그에 맞장구쳐줄 수 없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본인이 학창 시절 학교에 전혀 협조적이지 않았는데도, 막상 부모가 되고선 학교와 교사의 서비스 정신이 부족하다고 소리높여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본인이 태만하여 학업성적이 낮았었는데도, 부모가 되자 교사가 학업이 뒤처지는 학생들을 끝까지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학교에서는 학부모 대표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 정작 SNS에는 학교와 교사의 교육에 대한 비난글을 올리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이들 모두, 제 시각으로는 진상 학부모입니다.
원래 진상(進上)이라는 단어는 과거 군주에게 중앙 혹은 지방 행정관이 물건을 바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점차 나라의 기강이 흐트러지면서 구할 수 없는 물건을 어거지로 구해다 바쳐야 하던 백성들이 단어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아 쓰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고 합니다. 혹은 임금님 모시듯 좋은 물건을 갖다 보내지 않으면 화를 내는 까다로운 고객을 업계에서 비밀리에 진상이라고 불렀던 것이 단어 사용의 시초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니 달리 진상이 있는 게 아니라, 고마운 줄을 모르고 자기가 왕이나 되는 양 누군가가 해다 바치는 걸 당연하게 받는 사람이 진상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맡아주는 대상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자녀의 성격적인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자녀가 딴 데 가서 불쾌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기만 한다면 진상 학부모는 정말 많이 줄어들 지도 모릅니다. 부모인 제게 장점만 있는 게 아니듯이, 제 자녀에게도 장점만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와 생활하면서 이따금 못난 행동을 보이는 제 아들이, 밖에 나가서 갑자기 성격이 바뀐 것처럼 예쁜 행동만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점이 튀어나와 제 아들이 학교나 다른 사회 공동체에서 지적을 받았을 때, 제가 이런 상황을 기분 나빠 하기보다는 ‘단점을 고칠 좋은 기회가 왔다’고 여기는 게 훨씬 감정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경제적이고 합리적일 듯합니다. 저에게는 제 아들이 지적을 안 받고 계속 단점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하는 게 더 겁이 납니다. 부모가 진상을 부려 당장은 자녀의 잘못이 없는 걸로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리 한들 대체 자녀가 거기서 무엇을 개선하고 배울 수 있겠습니까?
모든 순간을 감사히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저에게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일상을 누리게 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인도 아닌 제가 ‘범사에 감사하라’는 구절을 좋아하게 된 까닭입니다. 저는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하고, 절망스러운 상황이라도 무조건 고맙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상황을 분석해서 그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면 훨씬 더 삶의 태도가 나아질 거라는 추천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장난을 자주 쳤고, 신랑은 어린 시절 산만했다고 하는데, 기막히게도 제 아들은 장난을 자주 치고 산만합니다. 한편으로 저와 신랑은 어린 시절 둘 다 책벌레라고 불릴 만큼 책 읽는 걸 좋아했는데, 하루종일 책만 읽은 날이 수두룩한데, 아들은 또 희한하게 이런 점은 그다지 닮지 않았습니다. 참 이렇게 조합이 되기도 쉽지 않지만 어쩌겠습니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걸요.
아이가 장난을 자주 치고 산만한 건 변치 않는 사실이지만, 이를 치환하여 아이가 건강하고 성격이 밝다는 점에서 저는 감사합니다. 아들 엄마라서 맨날 대신 혼나고 사죄하지만, 또 이를 치환하여 마침 잘 혼나고 잘 사죄하는 제가 엄마라서 선생님과 부드럽게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합니다. 최근 난임인 분들도 많고 저 역시 유산을 두 번 했지만, 저와 신랑을 닮은 아이를 무사히 낳아 기르고 있다는 현실 자체에 다시 감사합니다. 늘 제 맘에 꼭 드는 선생님이나 교육 기관을 만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어떠한 사람과 단체가 제 아이의 안위를 걱정하고 제가 직장을 다닐 수 있도록 시간을 내어 아이를 돌봐주는 데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저 자신에게도 감사합니다. 3억이 넘는 돈을 잃고도, 여전히 삶에 고마움을 표할 수 있을만큼 제가 정신적으로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으쓱거리며 저의 소회를 담은 글도 쓸 수 있어 정말 감사합니다. 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