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가본 일본의 뒷골목
작은 의원을 개원하고 있기 때문에 자리 비우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진의사 구해야 하고, 한 두 달 전부터 환자들 약속 날짜 조정해야 하고, 안 좋은 사람 있으면 공항에서라도 건사해야 한다. 그래서 대학에 있는 친구들이 학회 삼아 가는 거에 비하면 외국 여행은커녕 휴가도 잘 못 갔다. 일본도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지난가을에야 처음으로 갔다.
일본은 네모다 라고 한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일본은 양가감정이다'라고 하지 않을까? 처음부터 싫어하는 사람도 많은 거고, 마니아스러운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개는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이번 여행에서도 그런 걸 많이 느꼈다. 가장 기억에 남은 순간은 연인을 위한 열차를 타고 단풍을 구경하는 건데, 오지랖 넓게 가이드 아줌마하고 일본 젊은이들의 결혼, 주택 문제 등등 걱정하는 수다를 떨다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 버렸다. 지나치는 건 순간인데, 되돌아가려니 한 시간이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가는데 그 열차가 출발하는 시각에 맞추려니 가이드 아줌마와 일본인 기사가 호들갑을 떨면서 사정 얘기를 하고 (욘지 뿡이라는 얘기를 여러 번 하던데, 속으로 방귀 뽕하는 연상을 하면서 멍하니 있었다) 그 택시기사가 역에 전화를 하고, 급히 달린다. 택시 미터기도 내리지 않고. '너의 이름은'에 나올 법한 시골의 밤길을 달리다가 결국은 시간에 늦었다. 중요한 건 이때, 이 택시 기사가 절대로 바가지를 씌우거나 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다. 역에 도착해서 시골 역장이 시간에 늦은 우리 차표를 수수료 받지 않고 다음 시간표로 물러줄 때, 일본 사람들이라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속에는 일본의 일반인들은 강박적이고, 이런 데서는 양심적일 거라는 기대가 있었고, 그런 기대 때문에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이드 아줌마가 일본인과 결혼해서 그 시어머니 되는 사람이 동네 창피해했다는 얘기, 그 가이드 아줌마의 입에서 나온, '일본 사람들은 죽음을 존중한다'는 얘기. 그 얘기가 왜란 당시 한국인의 이 총에 관한 얘기라 속으로 매우 불편했다. 말의 의도야 일본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예의 같은 게 있기 때문에 비록 적국이지만 조선 사람들의 이총(耳塚)을 잘 가꾸었다는 의미로 얘기하려는 것이겠지만, 그 말을 우리가 '그렇군요' 하면서 들을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교토라서 역사적인 게 많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포스터를 보고 있으면 참 가까이 하긴 어려운 나라라는 마음이다.
아톰이나 도전자 하리케인이 일본 거라는 걸, 아니 다른 나라 것이라는 걸 생각도 못하다가 나중에 알 고 묘한 배신감을 느꼈었는데, 이런 장면 보면 어릴 적 동네하고 비슷하다. 전봇대, 심심하게 세워져 있는 차, 느릿느릿 지나가는 차.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사람이 훨씬 적다는 거.
어린 시절 살던 동네도 알고 보면 왜색이 짙었다. 우리 집에만 해도 다다미가 깔려 있었으니. 사소한 거 하나하나가 다 닮았다. 동네, 언어, 문화 등등 모든 게 왜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3박 4일 짧은 기간 내내 절 밖에 없는 관광지보다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자극하는 일본의 골목들이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어려서 떠나와 낯설기만 했던 고향, 돌아가시거나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누워계시는 어른들. 연락이 끊어지고 할 수도 없게 된 지인들. 무엇보다, 소멸해 가고 있는 내 기억들. 그 가운데 처음 가 본 일본의 골목이 준 느낌은 특별했다. 그리고 씁쓸했다. 내 어린 시절은 온통 다 왜색이었구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기란 원래가 힘들다. 사람이 원래가 그렇게 생겨 먹었다. 그렇게 마음먹어서가 아니라 그 마음의 물질적 토대인 뇌가 그렇게 생겨 먹었다. 여행이라는 것도 그런 거 아닐까? 일상을 벗어난 새로운 뭔가가 내 안의 깊이 숨어 있는 걸 일깨워 불러와서 눈 앞의 낯선 현실과 탱고를 추듯 새로운 경험 하나를 만들어 낸다. 내 버전의, 지극히 사적인 버전이면서도 현실이라고 착각하며. 뇌가 그렇게 생겨 먹었다고는 해도, 일본은 너무 자극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