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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힘 Mar 03. 2019

타고난 이야기꾼인 우리의 뇌.

근데, 거짓말도 마다하지 않아요



스토리텔링 기능은 좌뇌의 활동이다. 좌뇌는 천성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좌뇌와 우뇌는 서로 약간 다른 기능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좌뇌는 논리와 수학적인 면, 우뇌는 시각, 공간 감각을 다루는 역할을 한다. 이런 역할 분담에 따라서 좌뇌는 우리 몸이나 바깥세상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게 뭔지 의미부여,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그 해석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하나는 패턴의 파악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에 대한 예측이다. 이런 남다른 좌뇌의 능력 때문에 우리는 작은 몸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포유류의 99%를 차지할 정도로 번성하게 되었다.  


이런 해석자의 역할은 제대로 작동하면 좋은데 잘 안될 경우에는 문제가 생긴다. 그 문제는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거짓말이다. 그리고 기억도 조작한다. 이런 예를 구체적으로 들어보자. 


술 마시면 작가가 되어 작화한다?


뇌가 거짓말을 한다는 불편한 진실은 알코올 중독 환자들의 사례에서 발견되었다. 뇌가 손상될 정도로 심각한 알코올 문제가 생긴 사람들(Wernicke-Korsakoff syndrome)이 기억 손실을 거짓말로 메우려고 하였다.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고 해서 작화증(confabulation)이라고 했다. 


모르면 대충 채워, 


그다음으로는 영국의 기억 연구의 대가인 프레드릭 바틀렛(Frederic Bartlett)이 1930년대의 연구에서 나타났다. 바틀렛(Bartlett)은 기억 연구에서 그 사람이 미리 알고 있는 정보의 영향을 배제하기 위해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민담을 들려주고 이에 대한 기억 검사를 시행했다. 거기서 발견된 흥미로운 점이 자기가 잘 모르는 건, 자기 식대로 스토리를 만들어서 채워 넣는다는 사실이었다. 문화적인 배경 지식의 결핍 때문에 잘 모르는 내용일수록 만들어진 기억들이 더 많았다. 물론 이런 스토리의 생성은 일부러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1950년대로 넘어가면 더 흥미를 끄는 사례가 등장한다. 간질은 지금은 많이 조절이 되는 질병이지만 1950년대에는 다루기 힘든 병이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그중 일부는 개인에게는 심각하지만 인류에게는 큰 통찰을 제시한 비극적인 사례들이 등장한다.  


HM, 이젠 Henry Molaison으로 별이된 환자. 

먼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환자로 꼽히고, 가장 많은 논문에 등장한 HM이라는 간질 환자이다. 이 사람은 어릴 때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뇌손상을 당하는 바람에 심한 간질에 시달렸다. 그래서 최후의 방법으로 1953년에 뇌수술을 했다. 옆머리의 안쪽 부분(내측 측두엽)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 수술을 통해서 그때까지는 모양이나 이름으로나 겨우 관심을 끌었던 해마라는 조직의 일부가 잘려 나갔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그의 간질 발작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기억하는 능력이 없어져 버렸다. 옛날 일은 기억하는데, 이제 막 경험한 일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로 심했냐면, 15분마다 그 사람을 만나러 가면 ‘만나서 반갑습니다’라는 인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런 그도 오랫동안 경험을 하면 다른 조직이 관여를 해서 기억을 하거나, 뭔가 느낌이라도 생겼다. 아마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래도 어디선가 본 놈 같아”  


하지만 그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으니, 뭔가 스토리를 만들어 냈다. 물론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인류에게 많은 통찰을 준 후 2008년에 사망한 그는 개인의 불행이 모두에게 큰 이득이 된 아이러니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뇌가 분리되면 마음도 나눠지는


그로부터 조금 후에는 같은 간질환자인데 다른 부위 수술을 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흥미로운 경우이다. 이번에는 양쪽 뇌를 연결하는 섬유 다발을 잘랐다. 과거의 뇌과학자들은 그 섬유 다발이 뭘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말 그대로 뇌의 양쪽을 그저 이어주는 역할만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현재는 뇌과학자의 대가이자, 다른 대가의 스승이고, 다른 대가의 제자인 Michael Gazzaniga라는 당시 대학원생이 뇌 양쪽이 서로 분리된 분리 뇌(split brain) 환자들의 연구를 했다. 

왼쪽 뇌와 오른쪽 뇌에 각각 다른 사물을 보여준다. 그러면 오른쪽 뇌만 본 것에 대해서는 뭔가 반응을 하는 데 그에 대한 설명을 지어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왼쪽 뇌 – 닭발 

 오른쪽 뇌 – 눈보라 치는 장면. 


 그러고 나서 그림을 주고, 당신이 지금 본 것과 연관된 것을 고르라고 하면 


왼쪽 뇌 – 닭을 잡는다. 닭발을 보여주었으니 당연함. 

오른쪽 뇌 – 삽을 잡는다. (눈보라 치는 장면을 봤으니 이해할만하다)


그런데 이 실험의 핵심은 여기서부터다. 


가자니가 - 왜 삽을 잡았어요?

분리 뇌 환자 – 닭장을 치우려면 삽이 필요하니까요. 


물론 삽이 필요한 이유는 거짓말이고 위에서 배운 대로 하면 작화증이다. 


여기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뇌과학, 인지심리학적 통찰이 많다. 우리가 뭔가를 사고 나서 그 이유를 물어보면, 그럴듯한 이유를 대는 데 사실은 그게 가짜라는 거고, 이런 실험을 통해서 과연 우리에게 자유의지라는 게 있느냐는 식으로 고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뭔가 미리 결정해놓고 설명을 나중에 달았으니 의지로 선택한 게 아니고 되는대로 선택해 놓고 나중에 갖다 붙이는 식인 거다. 


여기까지 보면 누군가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고, 저 주장이라는 게 나중에 억지로 갖다 붙인 합리화라고 의심하는 게 꼭 병적인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치명적인, 기억의 불확실성 


이제 1980년대로 넘어가면 조금 더 어둡고 비극적인 사례가 나온다. 미국에서 1970,80년까지는 정신치료/심리치료(psychotherapy)가 매우 유행했다. 내가 좋아하는 우디 알렌도 오랫동안 정신치료를 받았고 자기 영화에서 그걸 많이 노출한다. 영화만 보면 정신치료 오래 받아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다. 하나도 나아지는 것 같지 않으니. 그런데 그렇게 불안 초조한 신경증 환자 모습을 보이는 게 우디 알렌의 콘셉트이라고 한다. 그는 사실 매우 냉철하고, 자기의 그런 모습을 영화에 잘 활용한 사례라는 것이다. 


하여간 이렇게 정신치료를 많이 받았는데, 치료사들이 매우 당황스러운 일들이 벌어진다. 환자/내담자들 중 상당수가 어린 시절 학대를 받았다는 것이다. 정의감에 불타는 그들이 부추겨서 수많은 고소 고발 사태가 벌어진다. 불행하고 비극적이라는 건, 그 고소나 고발의 대상이 친부모일 경우도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리가 나서 차근차근 조사를 했다. Elizabeth Loftus라는 사람이 이에 대한 연구를 해서 이런 기억 중 (전부는 아니겠지만) 많은 수가 거짓이라는 걸 밝히는 연구를 해서 언론에 공개를 했다. 이로 인해서 이제는 반대 고소 고발이 이어졌다. 게다가 유전자 감식이 발전한 이후 단순히 목격자의 증언에 의해서 유죄판결을 받은 죄수들이 많이 풀려나는 일도 있었다. 그 이후 증인의 증언에 대해서 더욱 철저한 검증을 한다. 

기억이란 게 우리 생각하는 것만큼 확실한 게 아니고(not a photocopy), 그렇게 확실치 않은 기억을 보충하기 위해서 이야기꾼인 좌뇌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아주 뻔뻔스럽게 거짓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니 확신에 찰 수밖에 없고 그러니 뻔뻔스럽다. 


뇌, 너는 도대체 왜 그러니? 


이제 우리의 뇌는 자기를 믿어달라는 오빠만큼이나 믿을 수 없다는 걸 확실히 알 것 같다. 그럼 왜 이러는 걸까?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거짓말도 불사하는 뇌의 특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프로이트식으로 바라보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말을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다. 불리한 것은 아예 기억에서 내보내 버리고(억압, 억제, 회피), 포장도 하고 (반동 형성), 자기가 옳다고(신포도로 대표되는 합리화) 한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조금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한 순간 처리, 기억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7자리 +_ 2자리 정도이다. (조지 밀러의 마법의 숫자  7) 그런데 우리가 의식 아래 부분에서 처리하는 정보의 양은 몇 메가가 넘는다. 우리 뇌는 매 순간순간 자기가 파악할 수 있는 정보보다 몇 십만 배나 되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고 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 간극을 메우고 있는데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건 나름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정확한 이론이나 예측에 기반해서 뭔가가 이뤄지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우연히 뭔가가 먼저 발견되거나 만들어지고 나중에 그에 대한 이해를 돕는 설명이 뒤따라온 것이 인류 지성발전사의 큰 흐름이었다. 아마도 유일한 예외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정도가 아닐까? 


말은 되는데, 뭔가 와 닿지 않는


그럼 아예 이런 거짓말을 모를까? 이야기는 만들어 냈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그래도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논리적으로 말은 되는데, 이해는 되는데, 뭔가 감정은 그렇지 않다. 정신 치료자는 이 구석을 파고들어 진실을 캔다. 감정에 대한 정의는 책으로도 몇 권이어서 한마디로 할 수 없지만, 


   감정 = 이성적인 뇌 아래의 뇌에서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정보를 다소 부정확하고 막연하게라도 처리하는 정보처리 방식 


   이성 = 더 확실하게 정리해서 처리하지만 양이 너무 부족한 정보처리 방식.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과 이성이 서로 모순되면 감정이 더 맞은 가능성이 많고, 그 불일치(mismatch)를 파보면 그 사람을 정말로 힘들게 하는, 이성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진실에 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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