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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힘 Mar 03. 2019

심리학으로 보는 인셉션

무의식의 놀이터 - 꿈. 

인셉션은 꿈을 다루는 영화이다. 심리학적으로 인셉션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꿈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꿈은 무의식이 노는 놀이터다. 디즈니 영화 환타지아를 보면 낮에는 조용하던 곳(마음속)이 밤이 되자 정령들이 나타나 활개 치는 장면이 나온다. 꿈과 무의식이 꼭 이렇다. 평소에는 억눌려 있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지만 꿈을 통해서 나타난다. 무의식은 여러 가지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기본적인 의미는 이렇다. 

의식 세계에서 너무 부담스럽고 불편해서 감당하기 힘든 것들을 의식에 못 오게 막는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은 서로 다른 것이다. 낮에는 사람(의식)이 되고 밤에는 늑대(무의식)가 되는 늑대인간이라면 낮의 사람과 밤의 늑대는 서로 존재만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을 뿐 서로를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코브의 아내에 대한 무의식은 이미 무의식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그러나 해결되지 않은 상처이며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꿈은 세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꿈을 꿀 때의 신체적인 느낌, 꿈꿀 시점 몇 시간에서 며칠 혹은 길면 몇 주 정도까지의 과거에 생긴 일들(day residue), 그리고 이뤄지지 못한 소망이나 상처의 3가지이다. 

영화에서는 이런 점은 잘 나타나 있다. 

꿈꿀 때의 신체적인 느낌은 어릴 때 생각하면 된다. 오줌이 마려운 신체상태가 되면 오줌 누는 꿈을 꾸고, 그 꿈을 꾸면서 실제로 오줌을 싸서 엄마 아빠에게 야단을 맞는다. ^^ 이 신체 감각이 가장 잘 나타난 장면은 특히 사람들이 많이 끌려하는 무중력 상태의 액션은 깨어 있는 사람들이 차를 타고 다리에서 떨어지고 있는 순간에 꾼 꿈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몸이 중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꿈속에서도 무중력 상태가 된다.


꿈꿀 시점의 일상은 성적인 욕망에 찬 사람이 매력적인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를 보았다면, 그날 밤이나 며칠 후에 그 주인공과의 성적인 교감을 나누는 꿈을 꾸게 될지 모른다. 영화에서도 피셔의 아버지의 죽음, 자기에 대한 실망에 대한 내용 등은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뤄지지 못한 소망이나 갈등, 상처가 꿈에서 반복될 수 있다. 코브의 꿈의 내용은 이런 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뤄지지 않아서 애타게 그리워하는 사람이 그 사람 꿈을 자주 꾸는 건 이해가 되는데, 안 좋은 일 즉 악몽은 왜 꾸게 될까? 프로이트는 이에 대해서 “마스터하려는 욕구” 때문이라고 했다. 감당이 안 되니까 억눌러 둘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 상태로는 견디기 힘들 기 때문에 꿈에서라도 자꾸 끄집어내서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해야 할 까? 그건 무의식의 기본적인 특성 때문이다. 

무의식은 (억누른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무의식은 의식할 수 없어도 그 사람의 마음이나 삶에 큰 영향을 준다. 

이 영화에선 의식되어 있는 죄책감이었기 때문에 좀 달랐지만 다른 영화라면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사람”이라는 무의식 때문에 다가오는 여자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남자 주인공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그럼 무의식을 의식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자기 마음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하던 무의식을 이런 식으로 꿈을 통해서 알게 되면 알기 전과 달라질까? 사실 이 점에서는 영화가 약간 심리학적인 면과는 맞지 않는다. 무의식도 자기 마음의 일부인데, 그 마음을 더 알게 된다면 자기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알게 된 무의식을 바탕으로 좀 다르게 그려졌을 것이다. 

만약 나한테 자문을 구했으면, 이런 점을 감안해서 

코브의 꿈에 어떤 이상한 마녀가 나타나서 일을 망치고 괴롭힌다. 그리고 아내가 나타나서 도와준다. “나를 죽였다는 죄책감 갖지 마라, 나는 괜찮다”는 메시지와 함께. 그러다가 점차 둘이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나가 되고, 결국 나중에 여자 설계자의 도움을 얻어서 그걸 알게 되고(무의식의 이해 혹은 의식화) 자신의 아내가 자신을 벌할 것이라는 무의식을 이해하고, 그걸 다루게 되는 식으로 얘기를 할 것 같다. 그런데 꼭 꿈이나 무의식에 대해서 정확히 할 필요는 없으니... 

인셉션은 꿈을 잘 다루었을까? 

사실 꿈을 영화적으로 잘 그려낸 작품은 셀(The cell)이다. 꿈은 소망 충족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에 소망만 충족되면 된다. 현실에서는 멋진 이성을 봐도 참아야 하지만, 꿈에서는 그 녀/그 남자가 갑자기 내게 다가와서 프러포즈할 수도 있고, 내가 달나라로 데려갈 수도 있다. 현실세계의 물리적인 법칙이 통할 필요가 없다. 즉 시간과 공간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시간의 법칙: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흐른다.

공간의 법칙 : 동시에 두 군데에 있을 수 없다. 지금 여기 서울에 있으면서 동시에 미국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셀]에서는 그런 점이 매우 잘 나타났는데 여기서는 그런 점이 없이 그냥 현실처럼 보인다. 

다만 꿈에서 다시 꿈을 꾸는 식의 설정은 매우 독창적으로 보이는데, 이런 점은 꿈속에서 또 꿈을 꾸기보다는 무의식의 깊이를 더해간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무의식이라고 다 같은 무의식이 아니다. 무의식도 레벨이 있다. 

그냥 약간의 기술적인 개입으로 의식으로 올라오는 얕은 수준의 무의식이 있는가 하면 너무 감당이 안되거나, 원초적이어서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의식으로 올 수 있는 깊이 있는 무의식도 있다. 

영화에서는 코브의 꿈에서 엘리베이터 신이 그런 현상을 매우 잘 그려냈는데, 너무 단순하게 처리해 버려서 좀 싱겁긴 했다. 

하여간 꿈속의 꿈은 무의식이 점차 더 깊이 들어가는 현상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냈고 이 영화에서 매우 매력적인 부분으로 보인다. 

영화로 돌아오면 

꿈이 복잡하지만 결국 피셔의 성장과 코브의 치유가 꿈의 기본적인 내용이다. 4개의 꿈을 통해서 피셔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던 못난이에서 아버지와 화해하고 자기 길을 걸어가는 어른이 되었다. 마치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평범한 찌질이 프로그래에서 인류의 구원자라는 걸 자각하고 그걸 받아들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는 과정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코브는 죄책감에 차마 떠올릴 수 없었던 아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지하 1층 무의식은 타인에게 매우 적대적인 피셔의 마음을 그려내고 있는 것 같다. 격렬한 차량 추격신을 눈요깃감으로나 쓰일, 좋은 내용을 할리우드 식으로 버려놓은 신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죽고, 아버지에게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데다가 삼촌이라는 사람도 근본적으로 자신을 후계자로 받들 지도 않고 자신을 해칠 수 있는 그런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남치는 너무 당연하다. 그는 모든 사람이 다 적으로 보이고, “걸리면 죽어”라는 심정일 것이다. 빗 속의 차량 추격전과 총격전은 이런 격렬한 피셔의 심정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거기에 코브의 아내까지 합세했으니 말할 것도 없다. 

지하 2층의 무의식은 피셔의 공격성 속에 가려진 무기력하고 의존적인 마음을 그렸다고 보인다. 아직은 의심의 눈초리를 풀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기대고 싶다. 그리고 그런 고난을 풀어낼 멘토가 필요하다. 그런 그에게 나타난 코브에게 의지하는 건 정해진 순서라고 보인다. 

지하 3층의 무의식은 이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더 깊이 있는 무의식을 알아보려는 마음이 든 피셔를 보여준다. 첫 꿈에서 납치를 당했던 피셔는 이제 특수부대가 되어서 공격의 일선에 나선다. 코브의 도움을 받았지만 자기 마음의 핵심적인 무의식을 들춰볼 용기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결국 총격전 끝에 그는 금고를 열게 된다. 이는 심한 저항을 이기고 자기 무의식을 느끼려 하는 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 방을 열고 들어가서 (그 전부터도 그랬을 것 같지만)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던 아버지를 대면한다. 그리고는 가혹한 존재였던 아버지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화해한다. 영화적 설정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인셉션해서 그렇게 된 것으로 나오지만 피셔의 치유와 성숙과정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여기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금고에서 나온 바람개비다. 아버지와의 평화로웠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영화 공부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보게 되는 교과서적인 영화 시민 케인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언론재벌이었던 케인이 로즈버드라는 말을 남기고 죽자 한 기자가 로즈버드를 추적한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에 그 로즈버드는 케인이 어린 시절에 타던 썰매였다는 걸 알게 된다. 전투 씬에서도 썰매가 나오지 않던가. 훈련 꿈에서 엘렌 페이지의 거울 장면도 그렇다. 오손 웰스의 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이 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16세 때 구상을 했다고 들었는데, 그도 아마 오손 웰스 영화를 텍스트로 보았을 것 같고, 그에 대한 오마주를 심어 놓은 것 같다. 


지하 4층의 무의식은 코브의 것이다.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하는 아내와 다시 한번 갈등하며 다툰다. 그가 피셔에게 도움을 준 것처럼 그도 역시 에리어 드니의 도움을 받아 부인으로부터 해방된다. 

세 번째와 네 번째 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적 대상이라는 개념의 이해가 필요한 것 같다. 아이는 9개월 이전에는 엄마와 놀다가 눈 앞에서 사라지면 없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다가 9개월이 지나면서 엄마가 숨어도 엄마의 상이 머릿속에 기억되면서 엄마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안 보이는 것이라고 알고 숨은 엄마를 찾는다. 이 과정을 통해서 아이의 마음속에는 실제 엄마를 원재료로 한 마음속의 엄마를 만들어 낸다. 이를 대상(object; 마음속에 있어서 내적 대상이라고 한다. 엄마와 비슷하지만 실제 엄마와는 다른다. 실제 엄마가 가냘프고 왜소한 여자였어도 아이에게는 엄청나게 큰 사람으로 기억된다. 사실 신경증이라는 게 이 내적 대상이 왜곡되고 병들어서 그렇게 된다. 그 내적 대상을 다루는 것이 정신과에서의 면담이다. 

실제 인물과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도 내적 대상과 싸우고 화해하고, 적절한 관계 형성을 하면 그 사람은 건강해진다. 부모에게 학대받은 아이가 나중에 크면 분명 정신적인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꼭 실제 부모와 담판을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도 자기 마음속의 부모를 잘 다루면 병이 낫는다. 

세 번째와 네 번째 꿈에서 피셔는 가혹한 비판 만을 일삼던 아버지의 상(이미지가 아닌 표상:representation이란 어려운 용어다)을 부드럽게 변형시켰고, 코브는 자신을 꿈속으로 세계로 끌어들이는 부인을 마음속에서 지움으로써 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두 사람 다 죽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실제 대상(실제 인물)과 갈등을 해결할 수도 없었겠지만 죽어서도 자기 마음속에는 남는 그 대상을 다루는 과정을 통해서 화해와 이별(건강한)을 한 것이다.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데, 사실 그건 무의미한 논란일 듯하다.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은 공각기동대부터 시작된 현실과 상상의 세계의 구분의 모호함, 경험이나 지각(perception)의 부정확성,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경험의 복잡한 관계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감독은 논란이 아니라 메시지를 던졌다. 영화 내내 삶이 꿈을 만들고, 그 꿈이 다시 현실에 영향을 준다고, 그래서 그 두 가지가 사실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이라는 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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