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생활

by 닳은 돌길

메신저를 열어 익숙한 손놀림으로 따각따각 그날 업무 내용에 대해 각 업체별로 보내고 엑셀을 열어 하나 하나 정리를 했다. 한창 바쁘게 오타는 없는지 잘못된 서식은 없는지 견적서를 눈이 빠져라 노려보고 있는데 오른쪽 하단에 노란 알림창이 뜨고선 충전중이었던 핸드폰도 "카톡"하고 그에 장단을 맞춘다.

엄마였다. 아침부터 아파트에 있는 수목원에 다녀왔는지 꽃들 사진을 잔뜩 보내시고는 "윤희야, 이쁘지?" 란다. Alt + tab 을 눌러 계속 엑셀 파일을 작성하려는데 마음이 두근거렸다. 조마조마함과 미안함이 한꺼번에 그 자리에서 내 생각을 악착같이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마냥 귀찮았을 내 마음에 문득 바쁘다는 이유로 마음이 아프다는 이유로 바깥과 단절된 생활을 하는 딸이 엄마는 못내 마음에 걸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엄마는 항상 그런 내가 애달팠다.


1남 1녀 중 장녀인 나는 일년 삼백육십오일을 무슨 일이 있어도 출근 시간을 사수하시는 대기업 다니시는 아버지와 하루를 빽빽하게 일과 취미 생활과 공부할 거리들로 메워 사시는 어머니가 너무 버거웠다. '바른생활 알레르기'. 바른 생활이 어떤 것인지 너무 잘 알지만 틈만 나면, 아니 틈을 만들어서 엇나가고 싶은 알레르기. 바람직한 생활에 대해 들으면 재채기 나고 어지럼증을 느껴서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해야만 하는 그런 알레르기를 나는 선천적으로 타고 났나보다.


어렸을 때부터 귀염상이고 애교가 많고 영어 단어와 한자에 능통해 영재 소리를 듣던 남동생과는 달리 무뚝뚝하고 조금 덜 똑똑했던 내가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기회는 상을 받아 오는 일이었다. 사실 물론 충분히 부모님이 바라는 바른 생활 레시피대로 공부를 잘 할수도 있었지만 괜히 그 요구대로는 하고 싶지 않았던 탓에 나는 각종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피아노, 독후감, 글짓기, 그림, 소설창작, 시조 창작, 작곡, 서예, 육상, 허들 각 종 대회에서 받아온 상장과 트로피를 전축 위에 올려 놓으면 무뚝뚝한 아빠가 퇴근 하신 후 전축 위를 보시고 "그랬어?" 하고 희미한 미소를 지을 때면, 엄마가 은근 슬쩍 얘는 재능이 많다며 얘기할 때면 그게 어린 나의 자존감이었고 너무나도 모범적인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돌파구였다.


지방에서 그냥 그 때 그 때 치는 중간 고사 기말 고사가 다였고 무작정 대회에 나가 상만 받는게 다였던 나는 수시라는 것을 몰랐고 수능 전담 선생님이 딱 한명 있을 정도로 선생님들도 대학 입시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리고 하필 수능 날은 너무 추웠다. 엿이 너무 달았던 탓인지 뉴스와 도로 환경과 응원한답시고 교문을 가득 메운 지원군의 환경이 너무 낯설었던 탓인지 어쨌든 절대 내 탓은 아닌 이유로 지방 4년제 대학교에 겨우 겨우 들어갔을 때 엄마는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어렸을 때부터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 좋다고 하는 책이란 책은 시리즈별로 다 사 도서관에 버금가는 집안 환경에 딸래미 공부 시키느라 동네 아이들 다 불러 직접 동화구연도 하고 과외도 시켰는데, 저 공부할 거 방해될까봐 텔레비전은 켜지도 않았는데 겨우 이런 결과라니 뭐든 수석이었던 엄마는 딸의 수능 결과에 패배감이 몰려왔다. 그날 밤은 유독 춥고 어두웠다. 패배감과 실망, 무너진 자존심을 한꺼번에 쏟아내며 엄마도 엉엉 목놓아 울어버렸다.


그런 딸자식이 일한답시고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훌쩍 외국으로 떠나 연락도 안 된다. 딸이 오년 만난 남자친구와 결혼은 안 하고 헤어졌다 만났다 하며 감정 소비만 하길래 얼른 안정을 시켜 주고 싶다는 마음에 빨리 결혼을 시키려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딸을 중국까지 시집 보내야 하는 것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쟤 고집을 어떻게 꺾어 하는 마음에 결혼 시키자 싶어 추진했는데 그게 내겐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니 결혼해' 하는 모범적인 부모님의 모범적인 인생관인 것 같아 또 바른생활 알레르기가 발작했다. 답답한 마음에 엄마는 전화를 걸어봤지만 중국어 안내 메시지만 들리고 그마저도 중국어라 왜 연락이 안 되는 건지도 알수가 없었다. 엄마는 다시 중문학과를 전공하여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오로지 딸이 왜 연락이 안 되는지 알기 위해서. 20대의 나는 그런 엄마의 마음이 미웠다. 아니, 정확히 얘기해서는 부끄러움이 너무 커서 그게 미움으로 반영됐을 수도 있다. 변변치 않은 딸이 아니라 어떻게든 반듯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싶었다. 그 해 생일에는 명품 가방을 엄마 생일 선물로 주며 나는 어렸을 때 내 상장을 자랑하던 것처럼 모임에 가방을 들고 나가 이거 우리 딸이 줬어하고 나를 자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같이 창업을 하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중국에서의 십년 생활이 방황으로 끝나고 한국에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 아빠는 그런 딸이 너무 안쓰러웠다. 바깥에 나가길 꺼려하고 집에만 있는 딸이 안타까웠다. 운동도 시키고 사람들도 만났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도 하고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등등의 생각들이 내게는 어릴 때와 같은 스탠다드 규격에 대한 부담감이었다. 한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그런 스탠다드 규격.


어쩌다가 어쩔 수 없이 엄마의 주변 사람들을 만나야 할 때가 종종 있다. "아이고, 윤희 오랜만이네. 그간 중국에 있었다며?" 하고 머리부터 발끝을 훑는다. 그 눈길에는 내 자괴감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나의 별볼일 없는 현재 모습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을 교양 있는 사람들끼리의 최소한의 예의 때문에 삼키는 걸로 느껴졌고 엄마는 나의 약점과 슬픔을 최대한 가리고 성과를 극대화 시키며 머뭇거리는 나를 대신 말한다. "윤희 중국에서 명강사잖아. 얘가. 학생이 그렇게 많아. 맨날 일하느라 바쁘고 그래서 한국에 잘 못왔지 뭐. " 나는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말이 아프고 미안하고 고맙고 따뜻했다. 하지만 그럴 때 나는 내가 사회가 정해놓은 부모님이 생각하는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는 표준형 인간이 아니라서 더욱더 '신경써서' 이야기 해야 하는 나의 표준에 어긋난 바르지 않은 상황이 서글펐다.


같이 어렵사리 저녁을 먹고 이끌려 마지 못해 호수공원을 걷던 날, 엄마는 내가 중국에 있을 때 너무 신나하는게 눈에 보여서 밝은게 눈에 보여서 중국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뜻밖이었다. 다른 사람이 결혼하는 나이에 결혼을 해서 '부끄럽지 않은 딸'의 부모이기 위해서 결혼을 시키려고 한 줄 알았는데 엄마는 단지 내게 그 때의 나의 모습이 너무 반짝 반짝 빛났단다. 그래서 얘는 중국에 있어야겠다 싶었단다. 내가 부모님께 가장 오래했던 얼토당토 않은 오해였다. 나는 그냥 다만 그게 옳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하는 줄로만 알았다.


매일같이 집에서 혼자 프리랜서로 일하는 내가 영 불안했었던 부모님은 지금 밖으로 조금씩 나와 사람들과 만나고 직장 생활을 다시 시작한 내가 아직까지도 위태롭고 안쓰러운가보다.

"이쁘네"

여전히 무뚝뚝한 나는 짤막하게 답을 한다. 마음이 슬퍼진다. 여전히 내가 엄마 아빠에게 자랑스러운 손가락이 아니라 아픈 손가락이라는 것이. 서른을 훌쩍 넘겨서도 나는 여전히 바른 생활과 스탠다드 규격 구간에 들어서면 재채기를 한다. 이제는 희미하게나마 부모님 마음을 알것 같기도 한데도 그렇다. 육십을 넘겨서도 몇 개의 대학 전공 공부를 하고 또 하고 취미 생활을 매주 같이 유지하고 일과 가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하루 하루를 성실하게 사시는 부모님의 표준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도달할 수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매일 매일 위태롭게 그 경계선에서나마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을 기특하게 여겨 줘야겠다. 더이상 조급하게 오해하고 도망가서 엄마가 또 다른 외국어를 전공하게 하는 일은 없게 해야지. 규격에는 안 맞지만 아주 바른 생활은 아니지만 거기에 맞게 노력하는 나라도 인정해주고 사랑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