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닳은 돌길

"음..."

H는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침대 머리 맡에 있는 핸드폰을 힐끔 본다. 익숙한 아이콘 옆에 떠 있는 숫자 3,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빼곡히 화면을 꽉꽉 채워 H의 아직 현실로 들어서지 못한 두뇌를 훅훅 잡아 당긴다. 분명히 문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알람시계보다 더 시끄러운 문자들.

벌써 사흘 째다.

요즘은 무슨 일인지 자꾸 이런다. 이번에는 어제 늦게 잔게 문제였다. H는 직업상 L과 만나기 전 항상 밤에 일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고 L은 새벽 일찍 집을 나서는 탓에 H와 L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 반대편에 사는 연애를 한지 어느덧 한달이다. H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L을 이해할 수 없었고 언제 또 화를 낼지 몰라 항상 조마조마했다. L은 점점 잔소리만 늘어가는 자신이 싫었고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H가 미웠다.

'나는 니가 날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해. 어떻게 너는 나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니?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건 나뿐인거야? 나 혼자 연애하니? 몇번을 말했니? 넌 왜 자꾸 이렇게 사소한 일을 가지고 날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내가 너랑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 게 너무 무리한 요구인건가? 내 출근 시간을 바꿀 수는 없는 거잖아. 너때문에 나는 일부러 늦게도 자 봤어. 그런데 너는 우리를 위해서 뭘 했는데? 너는 충분히 자유롭게 시간 조정 할 수 있잖아. 그깟 습관 좀 바꾸려고 노력이라도 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말을 안 해. (후략)'

H는 수많은 문자들 속에서 정신이 혼미했다. 띄어쓰기가 따박따박 잘 되어 있었지만 대체 어디에서 숨을 쉬어야 할 지 모르겠을 수많은 글자들. 정신을 좀 차리고 L의 말에 하나하나 나름대로 성의껏 대답하기 시작한다.

'방금 일어났어. 나야 언제나 널 생각하지. 배려가 없다니 ...'

여기까지 쓰고 H는 억울함이 치밀었다. 아니. 배려가 없다니.

그래도 나름대로 L을 신경 쓴다고 썼다. 물론 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게 항상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깨어있는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L에게 잘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L이 그간 만나온 다른 남자들에 비하면 로맨틱하지도 않고 돈이 있어서 선물을 사주고 돈을 쓰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는데 배려를 안 한다니.

'그럼 내가 그동안 한건 뭔데? 네 눈엔 내가 잘못한 것만 보이고 너를 위해서 한 내 모든 노력은 아무것도 아니지. '

여기까지 써 보내고 H는 정신을 좀 차려보자는 생각으로 화장실에 가 물을 얼굴에 퍼부었다. L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회의를 하면서도 마음은 항상 H에 대한 불만으로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 그러던 차에 받은 메시지.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답변인데. 자신의 메시지를 받고 H가 '그러게... 그간 많이 서운했었겠다' 라고 말해주고 마음을 헤아려주길 바랐는데 자신의 섭섭함과 고민은 싹 무시한채 H는 역으로 자신에게 화살을 돌렸다. 정말이지 아무말도 하기 싫은 순간이다. 이런 남자를 데리고 무슨 얘기를 하나 싶어 화가 치밀어 애꿎은 키보드만 신경질적으로 탁탁탁 두들겼다.

그날 저녁 L은 술이 마시고 싶었고 H는 혼자 조용히 있고 싶었다. L은 술에 취하면 H가 정신 차리고 L을 말리고 찾아 와 L이 그토록 고팠던 사랑과 이해를 주지 않을까 했고 H는 L이 너무 바빠서 혹은 스트레스가 많아서 각각 조용히 시간을 좀 가지면 괜찮아질거라 생각했다. 바에 앉아 술을 마시는 3시간 내내 L의 핸드폰은 조용했다. L은 H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절망했고 H는 이쯤이면 L도 마음이 좀 풀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반, 여태 답변이 없는 것에 대한 불안감 반 초조한 마음으로 L의 귀가를 기다렸다.


"삑삑삑삑삑-삑 . 띠리리릭"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 그리고 문을 여는 소리 그리고 뒤이어.

쾅. 문을 닫는 소리.

"왔어?"

H는 최대한 따뜻한 말투로 인사를 건네며 L의 눈치를 살핀다. L은 그런 H가 더 미웠다. 나에 대한 걱정이 먼저여야 하는 거 아냐? 이제 정말 끝인거니? 이런 저런 생각에 L은 눈물이 났다. 3시간 동안이나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마신 탓도 있다.

"넌 정말 나를 몰라"

H는 또 다시 시작되는 전쟁에 머리가 아파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여자를 내버려두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너도 날 몰라"

H는 L이 야속했다. 이해가 안 갔다. 왜 매일같이 이런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건지.


L과 H의 이별은 여느 이별과 같이 아팠고 가끔 보고 싶어 눈물이 나 다시 한번 시작해 보면 안 되냐는 메시지로 질척거렸고 돌이켜지지 않음에 절망했고 기대와 습관이 차가워지는 과정이었다. 어느 순간에는 이런 걸로 우리가 헤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애달팠고 어느 순간에는 딱히 뭐가 그립다고 말할 수 없는 막연한 그리움에 더 이상 못 살 것 같았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 했으니 생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그 마음을 떨구는 과정인데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심과 오만 그리고 순조롭지 않았던 대화들이 엉키고 설켜 두 사람은 마침내 이별한 순간이 더욱더 익숙해져갔다. L에게는 새로운 사람이 생겼고 H는 여전히 해가 떠서야 불을 끄고 잠이 들었다.


L은 이제 말이라는 것은 할 수록 감정이 채인다는 것을 안다. 어떤 때는 그 마음을 접어 버리고 훌훌 다른 것을 이야기하다 보면 사실 그것도 별일 아니라는 것을. H는 이제 억울함이 아닌 부드러움으로 상대의 화를 대하는 방법을 안다. 이해받지 못함에 대한 억울함이 아니라 화가 났을 때의 언어들은 사실의 폭로가 아니라 감정의 폭로라서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만 골라서 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H는 말의 내용보다는 감정을 풀어주는데 노력할 수 있게 되었다. L도 가끔은 H가 생각나고 H도 가끔 L이 생각난다. 그 때 그 사람이 했던 말들이 생각나고 그 마음이 이해가 될 때면 그 마음을 묵묵히 더 깊은 곳에 삼켜버린다.


그 둘은 서로의 낯설고 불안했던 시간들 속에 훑고 지나간 온기로 만족한다. 자의이든 타의이든 그게 최선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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